오빠의 원호연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원호 연금을 타러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우체국엘 갔었다. 절차를 밟아드리고 연금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잠시 오빠를 생각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해도 그러나 잊을수 없어 이처럼 불현듯 혹은 때때로 기억나는 내 오빠의 죽음을.
어머니가 맏아들인 오빠를 전장에 내보내시던 날은, 진눈깨비가 평평 쏟아지던 50년 겨울이었다. 비에 섞인 눈은 오빠의 보자와 어깨와 가슴으로 흘러내렸고, 오빠는 그 진눈깨비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정말 그건 마지막 인사가 틀림없었던 것이, 그렇게 나간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 때 오빠 나이 18살이었다.
우리가 연금을 타러 갔들 때는 연금을 주기 시작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는데 그 때까지도 계속해서 할머니들이 연금을 타러 들어오셨고, 앞으로도 타갈 연금의 증서가 책상에 많이 쌓여 있었으니, 도대체 얼마만큼의 젊은 목숨들이 그 전쟁에서 사라져 간 것일까. 가슴이 저려온다.
어머니는 돈을 받으실 때마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아드시고 그리곤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게 어떤 돈인데…. 정말 어떤 돈인데.』
오빠와 함께 이름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로 해서 오늘의 네가, 내가, 우리가 존재해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아들이 부모를 죽이고, 게다가 선생님을 우롱하고, 내가 잘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모든 행위 같은 것, 어찌 그뿐일까. 안일, 나태, 사치나 허영 같은 것, 노력없는 소득을 바라는 것 모두를, 작은 의미의 싸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하게 살고 싶다.
이웃이 잘 되면 함께 기뻐하고, 슬픔이나 고통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선한 생활이고 싶다.
어머니는 늘 마음이 허전해하셨다. 어머니에게 오빠는 어느 이야기에서처럼 눈멀고, 다리·팔이 잘린 병신으로라도 돌아와 어머니 곁에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원호 연금을 소중하게 받아드실 매마다, 그리고 내 오빠를 비롯하여 이름없이 죽어 간 많은 병사들의 죽음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내 생활이 겸손해야 하는 의미를 깨닫는다.<서울강서구화곡동29의214>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