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1)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4) 장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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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육사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내가 나온 학교라서가 아니다. 일본육사에 대해서 내가 잘알고있어 쓸거리가 많대서도 아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있고 이 글을 통해서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일본육사 출신들 가운데는 친일한이도 많지만 더 많은 분들이 구한말의 조선군으로, 일제때는 독립군 또는 광복군으로 큰 공을 세웠고 해방후에는 우리 국군의 건설에도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의 적국이었지만 일본서 배운 지식과 기술에는 적성이 있을 수 없는것이다.
당시 우리 청년들이 일본 육사에 가거나 학병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을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가까운 선배나 민족지도자들을 찾아가 의논하곤 했는데 대체로 그분들의 말씀도 『약소국의 공통된 지상명제는 부국강병이야. 가서 일본놈들 보다 더 많이, 더 잘배워두게. 다 우리나라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때가 있을걸세』 였다.
그런 말씀이 없었더라면 가기를 단념했을 청년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런 말씀 때문에 가서 열심히들 배우기도 했던것이다.
어쨌든 일본육사와 우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비극으로 시작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육사 입학자는 구한말의 박유굉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때 일본공사관이 습격받고 일본인 군사교관 호리모또(굴본) 중위가 피살되어 일본의 항의를 받은 조선정부는 일본에 사과사절단을 보냈다. 단장은 고종의 사위 박영효였다.
박유굉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따라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유년학교를 거쳐 이듬해 일본육사로 진학했다.
일본육사의 기록에 의하면 박유굉은 졸업후에도 귀국치 않고 있다가 1885년9월 자살한것으로 돼있다.
그것은 1884년 친일개화파의 쿠데타(갑신정변)가 실패하여 그 세력이 몰락하자 박유굉에게도 본국정부로부터 소환령이 내려 고민끝에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유학생은 친일과 개화파로몰려 본국의 정권이 반일세력으로 바뀌면 그 피해가 곧 유학생들에게 미쳤던 것이다.
1902년엔 4년만에 다시 조선인 8명이 입학했다. 이들이 15기로 이른바 「8형제파」라고도 하는데 거기엔 쟁쟁한 인사들이 많았다.
구 한국군 소장이고 영친왕(이은)의 전속무관이된 김응선장군, 일제때 도지사와 상업은행 두취(은행장)를 지낸 박영철선생을 비롯하여 조선군 대좌가 된 박두영선생, 조선군 중좌였고김정렬장군(전공군참모총장·국방장관)의 큰아버지인 김기원선생, 독립투사인 이갑선생, 유동설장군이 그들이다.
이들은 졸업후 일본군에 편입하여 만주에서 벌어진 노일전쟁에도 참전, 전투경험을 쌓기도했다.
이갑선생은 다시 조선군에 편입됐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망명을 떠나 만주·시베리아등지에서 안창호·신채호·이동휘·이동령선생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다 1917년6월 시베리아땅에서 41세를 일기로 돌아갔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이응준군에게 내딸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일본군 중위였던 이응준장군은 육사선배이고 자기를 친아들같이 키워준 이갑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3년후 이갑선생의 외동딸인 이정희여사와 결혼했다.
이응준장군은 17세매 고향인 평남 안주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당시 조선군훈련원장인 노백린정령(대령)댁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갑선생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 입주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유학도 하여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그러나 한분은 독립군, 한분은 일본장교로 마주 서게 되었으니 국가비운을 맞은 젊은이들의 갈등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관계는 그런 운명의 장난을 초월하고 있었다. 원래 일본군 장교는 육군대신의 사전승인을 얻어 결혼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장군은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이정희여사와 결혼하여 말썽이 됐다.
당시의 일본 육군대신은 이런 보고를 받고 『조센진은 할수없군』 하면서 가볍게 선처하여 「근신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군인들 사이에선 퍽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정희여사는 올해 85세로 92세인 이응준장군과 함께 금실좋기로 이름난 부부로 살아오면서 최근에는 『아버님 추정 이갑』이라는 책을 내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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