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역전드라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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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실명제의 운명을 결판지은 29일의 당정회의에서는 여러 차례 극적인 고비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실명제에 대한 민정당의 반론이 우세했던 27일, 분위기가 반전→재전된 28일을 거쳐 29일상오 8시30분 당정의 최고 간부들이 중앙청 후생관에 모였을 때만해도 다시 당세 우위는 절정적이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민정당의 목표관철에 재무팀의 명분유지라는 절충선.
이제 판가름은 거의 난 셈이지만 아직도 노무·기술적문제는 적잖게 남아 있다.
○…당정협의의 첫 라운드였던 중앙청 후생관 회의는 처음부티 민정당이 기선을 잡았다.
회의참석자들 대부분이 민정당의 실시연기에 동조하는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강경직 재무장관이나 김재익 청와태 겅제수석비서관 등이 반논을 펼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
이재형 대표위원·권익현 사무총장·이종빈 총무가 주축이 된 민정당쪽은 연기는 기정사실로 보고 실시연기에 따른 정부의 명분을 어떻게 세우느냐는 문제로 얘기를 끌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정당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법안을 철회하고 실명제를 86년부터 실시하자는 복안을 제시했다. 실명제가 당장 경제에 끼치고 있는 충격과 앞으로 더욱 심화될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이 방법이 최선의 것이라는 주장.
정부쪽에서도 민정당이 86년을 주장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때문인지 별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김상협 국무총리는 민정당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였고 김준성 부총리·노태우 내무장관은 「묵시적 동조」 의 입장. 이렇게되자 당연히 다른 주장을 펼 것으로 예상되던 강 재무장관· 김 청와대 경제수석도 별로 입을 열지 않더라는 얘기다.
민정당은 미리부터 이런 국면을 예상, 발표문 초고까지 만들어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골자는 실명제는 궁극적으로 실시돼야 할 우리 경제의 과제이며 또 실시되어야 한다는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현재의 국제경제 동향이나 우리 경제여건으로 봐 당장 실시는 어려우며 이 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기반조성에 시간을 두고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다△따라서 실명제는 86년 이후에 실시하고 정부는 국회에 제출한 금융실명거래법안을 철회한다 △다만 실명제실시 기반조성을 위해 내년부터 실명예금과 가명예금의 이율에 차등을 두되 가명예금자를 응징하는쪽 보다는 실명예금자에게 이율상 보너스를 주어(특별가계예금식)실명화를 권장한다는 것 등.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자리를 옮겨 한번 더 논의해보자는 제2라운드가 전격 주선되었다.
○…자리를 옮겨 참석자수가 늘어난 제2라운드 회의는 토론의 차원과 분위기가 시작부터 후생관 회의와는 달랐다.
다소 욕하는 측이 있더라도 정부가 발표한 정책은 밀고 나가야 하지 않느냐, 실시연기를 주장하는 민정당의 논거가 과연 합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냐는 각도에서 문제가 재검토되기 시작.
우선 민정당이 정부원안의 문제점을 다시 개진했다.
그러나 민정당의 논거가 약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언론을 통한 여론이 반드시 정확하다고 만은 볼 수 없다』 『반대하는 사람이 소수가 아니냐』는 반문에 『비록 3천9백만명 중 1%가 반대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고려해야한다』는 찬반이 교차하는 가운데 중앙청에서 보였던 민정당의 기세가 주춤하는 형국을 이루었다.
이때 김준성 부총리와 노태우 내무장관이 민정당의 주장을 뒷받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총리는 작년 동기에 비해 저축성예금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의 통화증발이 예금으로 흡수되지 않고 있는 일은 우려할 만하다고 말했다는 것.
노 내무는 17세 이하는 주민등록증이 없는데다 주민증 추적이 불가능한 사람이 6백만명에 이르며 토지대장 등 각종 재산관계 공문서가 컴퓨터화 할 만큼 정리되기까지는 최소한 84년이 되어야 하고 그 이전 실명제의 당장 실시는 행정력이 뒷받침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돈을 가진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재산을 분산할 때 추적·취합이 현실적으로는 무척 어렵다는 점도 지적돼 우선 6대 도시부터 실시하고 단계적으로 확대해도 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왔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쯤와서는 결론이 가까워졌다. 여당인 민정당이 반대하고 경제총수인 부총리가 걱정한다면 실명제를 당장 강행하는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집약된 것이다.
실명제실시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살리면서 문제는 보완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 결과 △법안은 이번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실시시기는 당정협의로 결정한다는 구체적인 선이 마련됐다.
아울러 국회 심의과정에서 실시시기를 시행령에 위임하지말고 가급적 본법부칙에 국회의 의사로 실시시기를 명기하는 것이 좋겠다는데 까지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 정책조정회의를 다녀온 민정당 간부들의 표정엔「득의」와 또 다른 「걱정」이 교차했다.
「연기」라는 초지는 일단 수용된 셈이지만 당초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정부안 철회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연기」문제를 어떻게 입법화해 통과시키느냐는 고민이 남은 것이다.
당초 희망대로 3∼5년 후에 실시한다면 그때 실시할 법을 이번 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건 적지 않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권익현 총장과 이종찬 총무도 당정간의 합의사항을 입법화 하는 것이 법체계상 어려움이 있음을 시인하면서 「중대한 연구검토사항」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관계자는 『정부의 공신력과 당의 의지를 법체계로 맞추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 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권총장·이총무는 이날 하오 국회에서 김준성 부총리와 접촉한데 이어 당내 법률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었다. 우선 시행시기를 실명거래법의 본법 부칙에 명기하는 방법. 당장 처리가 손쉽고 형식의 면에서 위법이 아니지만 몇 년 후의 경제상황이 어떻게 달라질 지도 모르므로 그때가서 입법화하자는 야당반대에 부닥칠 것은 뻔한 일이고 입법관례상으로도 문제가 있다라는 반론에 부닥쳤다.
다음은 본법 부칙에 시행일을 막연하게 표현하는 방안. 이 같은 입법례는 현재 국토이용관리법 중 일부 내용이 있다. 투기 등이 일어나면 건설부장관으로 하여금 규제지역을 고시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예를 적용하면 『언제 실명제를 실시할지 모론다』 는 불안감을 국민에게 안겨줄 우려가 있다.
당정합의에서는 일단 제외되었지만 시행일을 시행령에 위임하는 방법도 있다. 이 입법례는 영해법과 원자력법이 있다. 영해법은 제정당시 국제해양질서를 관망해봐야 할 필요성 때문에 원자력법은 워낙 기술적인 문제가 복잡해서 시행령에 기한을 두었으나 그것도 6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민경제에 민감한 영향을 주는 법에 이 같은 입법례를 적용하기는 어렵다는게 중론.
마지막 검토대상은 일본의 그린카드제와 흡사하게 시행기일을 멀찍이 잡아 새로운 입법례를 창출해내는 것. 그린카드제는 80년에 자민당의 의원 입법으로 통과됐으나 시행기일은 84년부터다.
이 방법을 원용할 경우 본법 부칙에 『이 법 공포 후 ○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행일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식으로 표현하거나 본문에 『재무장관은 시장상황을 여러 요인을 감안해 실명제 실시에 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는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방법도 논란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정책적 사유가 있으면 할 수 있다』는 판단이고 따라서 민정당이 본법 규정에 충실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전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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