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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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근호의 말이 맞는 소리였다. 공단 본부 건물 앞에 가면 '싸우면서 일하자'라든가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크게 붙어 있었고 그 아래 다시 '노동력 80프로, 기계 20프로'라고 써붙여 놓았다. 그만큼 구로공단의 당시 형편은 노동집약적인 일감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하청받은 일감을 몸으로 때우면서 저임금으로 남겨 먹는다는 얘기였다. 일본은 요즈음의 우리 사정처럼 경공업이나 사람의 일손이 많이 가는 업종은 모두 한국이나 동남아에 하청을 주거나 공장을 해외로 내보내고 기술집약적인 일만 국내에서 해내는 중이었다.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농촌의 땅 없는 농민층의 분해를 밀고 나가야 했고 도시 주변으로 몰려든 값싼 노동력을 먹여 살리려면 저곡가를 유지해야 되었다. 그 무렵 군사정권의 슬로건은 '선건설 후분배'였다. 요즈음도 하는 소리지만 '파이를 키워서 나눠 먹자'는 얘기다. 참을성 없는 놈들은 도태되거나 죽어 나가도 아랑곳없다는 식이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민중'이 누구인가 하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전후에 전 국민의 거의 80프로가 농민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천만 노동자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소작농은 거의 없어져 버리고 중소농만이 농촌에 남았고 각종 서비스업이나 행상에 종사하는 도시 빈민이 늘어갔다. 그러니까 국민의 대다수가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그리고 일반 서민들인 셈이었다. 이들이 서로 연대하고 조직화되어야 독재 정권과 싸울 수 있다는 주장은 당연해 보였다. 나중에 도시에서 식구들과 집 한 칸에 밥만 먹고 사는 형편이 된 사람들도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한동안 가정하고 있더니, 드디어 1980년대 중반기에 가서야 이 생각은 '시민'으로 바뀌게 된다.

나는 근호의 충고대로 다른 업종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임금도 높은 공장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근호는 내가 군대도 갔다 왔고 나이도 들었으니 힘은 들겠지만 육개월만 고생하면 기술도 손에 익고 노임도 많이 받게 되는 일터가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터가 분위기가 좋다는 것이다. 대개 공원들도 나이가 들었고 배운 사람들이 많기 마련이라고 했다. 여기서 배운 사람이라는 것은 고등학교 정도는 나온 사람을 의미했다. 사람이 많고 노임도 박하고 들고나기 쉬운 일터는 어린 사람들이 많은 데다 직장에 정들이 없어 서로 친해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강씨네 하꼬방에서 끼여 자다가 그 주말에 강씨와 근호와 내가 새벽부터 설쳐서 부엌 앞방에 방고래를 모두 뜯고 온돌을 다시 놓았다. 마지막 마감 미장질까지 끝내고 나니 어둑어둑한 저녁 밥 때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돼지고기 한 근 사다가 두부와 감자 넣고 고춧가루 벌겋게 풀어서 찌개 얼큰하게 끓여서는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연탄불을 들여 놓으니 시멘트 바른 방에 김이 나면서 말라 갔다. 이제 거처도 생겼고 같이 방을 쓰는 근호는 동생처럼 든든하기도 했다. 그가 채근하여 강씨가 누구인가를 내게 소개하겠다는 날이 왔다. 그가 아홉시에 야근을 들어간다니까 일곱시에 포장마차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차피 술이며 저녁 요기는 내가 사야 할 판이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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