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서 태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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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출옥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엔 일본의 중앙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해 수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기울어 간듯하다. 그는 21년11윌 아나키스트파 학생들의 모임인 흑수회에 참가해 소위 진보파로 자처하던 학생들과 어울렸다. 흑수회는 22년1월 아나키스트파는 흑노회로, 좌경학생은 북성회를 조직해 두개로 갈라졌다. 좌파 모임인 북성회는 김약수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일본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후원도 받았다.
그런데 죽산은 이때 그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가 23년에 2년제인 모스크바 동방공산노력자대학을 나왔다는 경력에 미뤄 아마도 21년후반에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대학에서수학했던 것같다.
1920년대는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항일조직이 활발히 태동하던 시기였다. 20년 장덕수씨등 민족진영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흩어져 있던 항일서클을 통합하는 조선청년연합회를 출범시켰다.
좌파도 포함된 불안정한 연합이긴 했지만 민족진영이 주도하는 단체였다. 장덕수그룹은 서울청년단을 조직해 이 연합의 중심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이때 여러 갈래의 서클로 분산돼 있던 좌파는 상해에서 온 이영의 노력으로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해 조선청년연합회를 이끌고 있던 민족진영의 주도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들 이영중심의 조직은 뒷날 「서울그룹」으로 불린다.
해외 공산당의 주류이던 이르크츠크파는 이무렵 국내조직에 착수했다. 몇차례의 실패를 겪은뒤 국내 잠입에 성공한 것이 김재봉이다. 그는 23년5월 서울에 들어와 신사상연구회를조직했다.
동방공산대학을 수료한 조봉암도 24년초 서울로 돌아와 김재봉과 합류한다.
이들은 시대일보등 몇개의 신문·잡지사, 그리고 중요도시에 그들의 세포를 늘려 좌파 주류로 성장했다. 그러다 24년11월19일 화요일의 모임에서 신사회는 「마르크스」의 생일을 따서 그들 서클의 명침을 화요회로 바꿨다.
25년 봄까지 국내의 좌파는 세개의 이질적인 그룹으로 흩어져 있었다. 주류는 이르크츠크파의 국내 조직으로 김재봉·조봉암등이 이끌고 있던 화요회. 다른 하나는 상해파의 국내 조직으로 이영을 리더로 한 서울 그룹, 또 다른 하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약수등이 조직한 북풍회였다. 이들 3파는 공산주의 단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섹트주의때문에 격심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런 세개의 그룹을 통합하는 주도세력으로 나선것이 화요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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