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적인 생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사람은 누구든지 일생을 살아가는데 가정과 직장·사회에서 인연있는 헤아릴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좋든 나쁘든 어울려 돕고 경쟁하면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역사를 만들며 살고있다.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옳은일과 그른일이 엄연히 있지만, 과연 어떠한것이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인지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한때 옳다고 했던 일이 종국에는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하고, 오늘에는 그릇된 일이 시일이 지난후에는 반대의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일뿐 아니라 사회의 역사발전도 긍정과 부정의 반복연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자유를 치우쳐 누리려고 하면 평등을 두루 갖기가 어렵고, 평등만을 강조하다 보면 제약된 자유를 가지기 마련이다. 물질문명의 발전에만 역점을 두면 정신문명이 침체하고, 정신문명에만 매달리다 보면 과학문명이 뒤떨어져 문명이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60년대부터 빈곤을 몰아내고 경제성장을 가져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상당한 경제상장은 가져왔지만 이로 인한 자연환경 공해와 도의심의 타락, 정신문화 침체가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70년대부터 도의와 윤리의 진작을 통한 사회정의의 구현이나 긍정적 민족사관의 정립등 정신문화문제가 사회각계에서 활발히 대두된 것도 물량위주의 경제성장에만 치우친데서 나타난 정신문화의 공허를 메우기 위한 반사적 노력이라고 볼수있다.
한말에 고위관직을 지내면서 크게 치부한 사람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치부한 사람도 있다. 그 재산을 모으는데는 꼭 정당한 방법만으로 한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 재산을 가진자들이 한일합방이후 일부는 일제에 친근, 비호를 받아 재산을 유지하기도하고 증식시키면서 그들의 자제들에게 근대교육을 잘시켰다.
서구식 근대교육을 받은 그들의 자제들이 광복이후에는 교육경제 문화사업과 또는 정부고위관리로서 독립된 우리나라의 성장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모든 사물의 생성 발전과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 반복·연속하면서 발전하는것이 궤범이라 할수 있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불타가 설한 연기법과 같이 모든 사물은 중중무진으로 연기속에서 생왕이멸하고 생성발전하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십문 화쟁론』에 두 극단론을 초월하면서 상호 융화를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유와 무를 초월하면서 유무를 융섭하고, 부정과 긍정을 초월하면서 둘을 포옹하는것이 진리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사물의 실체는 상대적인 관념을 초월하여 모든것을 하나도 버리지 많고 포옹하면서 모든것과 적응하여 중도적으로 나타날때만이 옳은 겻이다.
아무리 옮은 말일지라도 일방적으로만 가면 통로가 막힌다.
인간사는 상호조화 속에 중도로 나타날때 만이 사통오달이 될수있는 것이다.
송월주<전북금산사·서울영화사회주>

<약력> ▲1935년 전북 정읍출신 ▲화엄사 불교전문강원수료 ▲동국대 행정대학원수료 ▲금산사개운사주지 ▲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 재단이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