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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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등소평은 대소관계 등 다른 얘기들을 한동안 나눈 뒤에야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앞서의 내 요청에 답변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한국문제를 거론했다고 말하고 북한이 한국을 공격할 위험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아직은 중공과 한국이 교역관계나 직접 교섭을 가질 수는 없지만 북한이 내놓은 남북회담과 선거에 의한 통일제안을 한국이 받아들이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그다지 긴밀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소련이 북한정책에 간섭하는 바람에 더욱 멀어졌다고 지적했다. 중공도 북한에 압력을 넣으려 들면 영향력을 잃으리라는 얘기였다.

<북한에 압력을 꺼려>
그러는새 저녁 연회 채비를 할 시간이 다 됐다. 그러나 등은 나에게 보좌관들이 득실대지 않는 자리에서 보다 은밀한 얘기를 하자고 요청했다. 우리는「먼데일」「밴스」「브레진스키」몇 통역들과 함께 각의실에서 내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등소평은 중공군으로 하여금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응징 공격하도록 하겠다는 그의 구상을 얘기했다. 그는 내게 도움말을 구했다. 나는 베트남이 국제사회에서 점점 고립되고 있는 데다 이웃 캄푸체아를 쳐들어갔기 때문에 침략자로 비난받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등의 생각을 돌리려했다. 중공이 하노이로 진격하면 오히려 베트남에 대한 동경이 일 수도 있으며 일부 국가들은 중공을 범죄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게다가 이 같은 군사행동은 새로운 미·중공관계가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증진에 이바지하리라는 우리의 가장 좋은 논리를 반박할 구실을 주게 된다고 말했다.,
등은 내 충고에 감사하면서도 중공의 건방진 이웃들에게 중공이나 부근의 다른 나라들을 건드리면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므로 나는 등에게 다음날 아침 얘기를 계속하자고 했다. 1시간쯤 후 우리는 국빈을 위한 환영연회자리에 다시 모였다.
활달한 등은 만찬상대로 그만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내내 그는 중국에서의 생활과 그 발전양상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내가 어렸을 적 관심을 가졌던 선교사활동에 관해서도 유쾌한 토론을 벌였다. 그는 중국에 온 외국선교사들 중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마지못해 인정했지만, 많은 선교사들은 동양의 생활방식을 서양 것으로 바꾸려 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침공계획 확고한 듯>
선교사들이 세운 숱한 병원과 학교들을 생각해보라고 내가 대꾸하자 등은 그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는 해외선교활동의 재개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중공기독교 신자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중공에서 성경을 마음대로 배포할 수 있게 하고 국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도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는 귀기울여 듣더니 연구해 보겠다고 약속했다(후일 등은 이 두 가지 충고를 정책에 상당히 반영했다) .
등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개선에 관심이 큰 듯 했다. 여기서도 그는 종교적 측면을 강조했다. 중공 안에는7백만 가량의 회교도가 있으며 정부는 그들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메카로 순례를 떠날 수도 있냐고 묻자,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것이 중요하다면 정책을 바꿀 수도 있다고 등은 대답했다. 우리는 나중에 이 소식을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날의 공식만찬에는 전 대통령 두 사람이 모두 초대됐다.
「닉슨」이 백악관에 나타난 데 대해 워싱턴의 보도기관들도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물론이다.
「닉슨」은 중공의 새 지도자들을 거의 알지 못했지만 짧은 리셉션 중에도 자신의 예전 중공방문에 관해 그들과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중공사람들이 사적으로 하는 말들로 미뤄 보건대 그들에겐「닉슨」은 언제나 존경스런 친구이며 워터게이트와 관련된 비난쯤은 하찮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케네디 센터에서 우리는 아주 멋진 공연을 즐겼다. 마지막엔 등 부부와 나와「로절린」「에이미」도 출연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등이 출연자들, 특히 중국노래를 부른 어린이들을 감싸안자 극장 안엔 감동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키스까지 했다. 신문들은 많은 관객이 울었다고 보도했다.

<닉슨도 등과 한자리>
미·중공 수교를 강력히 반대해온「랙설트」상원의원은 공연이 끝난 후 이젠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 중국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등과 부인은 정말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등은 극장관객은 물론 TV시청들에게도 단연 대인기였다. (일기·78년1월29일)
다음날 아침 일찍 등과 나는 내 집무실에서 통역 한사람만 곁에 두고 다시 마주앉았다. 나는 중공의 베트남 침공을 만류하는 이유를 요약해 직접 쓴 쪽지를 소리내어 읽은 후 등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설사 중공이 공격하더라도 곧 군대를 철수할 것이며, 작전의 효과는 유익하고 지속적이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날 밤과는 전혀 달리 이날 아침의 등은 자신의 나라가 나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굳게 마음먹은 강인한 공산지도자의 모습 그대로 였다.
그는 베트남문제는 아직은 미정이라고 했지만 내가 받은 인상으론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베트남은 응징 받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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