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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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동해보복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원시사회에서 비롯된 형벌의 하나. 일명「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라고도 한다.
그 유명한 구절이 구약성서에도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목)은 눈으로, 이(치)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낙) 은 데움으로, 상(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얘기를 기록한 『출애굽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류 형벌의 역사는 이 탈리오의 법칙에 의해 형평을 찾게 되었다고도 한다.
기원전18세기 고대바빌론의 왕「하무라비」가 그 성문법전을 만들기 전까지도 범죄자들은 무제한의 보복을 당했었다. 인류는 탈리오법 이후 비로소 그런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오늘 아랍세계에서 도둑의 손목을 자르는 형벌도 그런 법의 정신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요즘 레바논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의 보복은 역사의 시계를 적어도 3천8백년 전으로 돌려놓은 것 같다. 그야말로 무제한의 보복이 끝도 없이 자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대학살은 아직 공식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시민들은 짐작하고 있다. 레바논의 침략자인 이스라엘은 그 책임을 쉽게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후견국인 미국조차도 분노의 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장사진을 보면 지옥이 따로 없다. 소년도, 부녀자도, 노인도 모두 쓰러져 있다. 그 참담한 광경이라니, 로마교황「바오로」2세의 표현대로 그 범죄를 규탄할 적절한 낱말이 없다.
아마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의 주검들이 그랬을 것이다. 유대인은 어느새 자신의 그 처절한 아픔도 잊고 있다.
유대인들의 교훈서인 『탈무드』를 보면 원수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 낫과 도끼를 비는 경우를 비유했다.
누가『낫 좀 빌려줘』라고 말했다가 거절당하고 나서 그 거절했던 친구가 어느날 『도끼좀 빌려줘』하고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네가 나에게 거절한 것처럼 나도 너에게 아무 것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대답할 때 그들의 사이는 원수라는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처럼 법정에서 채무자의 살 한근을 꼭 떼어내겠다고 고집하는 유대인의 심리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보복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또 다른 보복뿐이다. 바로 오늘의 중동사태가 그렇지 않은가.
서양의 속담이 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보복보다 더 영예로운 보복은 없다. 』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귀엔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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