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풍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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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보는 밤(율)을 좋아했다. 그의 시가엔 밤 얘기가 많다.
-시골집에서 방금 쪄낸 따뜻한 밤(산가증율난).
-벼농사는 풍년이 들고 밤알은 주먹만하구나(양다율과권).
-집뜰에서 밤알을 거두었으니 가난한 건 아닐세(원수우율미전빈).
청빈한 시인은 밤 한알을 보고도 천하의 인정과 태평을 노래한다.
시인이 아니라도 어느날 문득 길거리에서 군밤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잠시나마 시인이 된다. 계절을 잃고 사는 도시인에겐 특히 그렇다. 계절도, 미각도 향수로 되살아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밤의 명산지였다. 중국사람들의 옛 기록은 우리나라의 밤알을 계란이나 배(이)의 크기와 견주고 있다. 벌써 1천7백년전의 『삼국지』에도 마한의 밤은 배만하다고 했었다. 당서 『수서』나 『북사』도 백제의 주먹만한 밤을 상찬했다.
원효대사의 고사도 있다. 대사의 어머니는 밤나무 아래서 분만을 했는데, 이 나무는 사라율(사라율)로 전한다. 그 밤알이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때에 가득찰 정도였다니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시속은 바뀌어 요즘은 자잘한 밤들을 「토종」이라고 팔고 있다. 무슨 기준인진 몰라도 토종밤이 그리 흔할것 같진 않다.
밤나무는 겉보기엔 강단이 있어 보이지만 의외로 병충에 약하다. 흑벌이 쉽게 덤벼들고, 동고병(동고병)이나 동해에도 견뎌내지 못한다. 게다가 퇴비까지 잊지 말고 듬뿍 주어야 한다.
한반도에선 신의주와 함흥 이남이 밤나무의 적지다. 물론 그 북쪽에도 밤나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확이 보잘것없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밤나무가 있다. 미국의 경우는 동고병에 약하고 밤맛도 별로 없다. 중국은 천진율이 유명하다. 약밤으로 불리는 감률. 같은 수종이라도 북쪽으로 갈수록 밤알은 작고, 남쪽은 크다.
그러나 지구의 남반구엔 밤나무가 없다. 세계적으로는 11종의 밤나무가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은 밤의 집산지. 세계 수확고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6만3천t의 밤을 거두었다. 올해는 더 풍년이 들어 길거리마다 밤이다.
우리나라는 벌써 오래전부터 밤을 곡수로 여겼다. 고려의 예종(예종)은 전국 방방곡곡에 밤나무 심기를 권장했었다. 조선조 태종7년(1407년)엔 법령으로 강변한지에 밤나무를 심도록 했다.
그러나 밤을 먹는 법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찐밤 아니면 군밤. 하긴 약식이나 떡고물이나 밤단자, 밤편, 밤엿도 있다. 그러나 그 맛이 그 맛이다.
프랑스에선 마롱글라세와 같은 별미의 과자도 있다. 꿀물을 스며들게 한 명과다.
우리 선조들도 무슨 별식을 궁리했음직하다. 요즘같은 밤풍년일수록 그런 궁금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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