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괴짜 총리의 도박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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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예상을 뛰어넘는 국회해산을 단행했다. 고이즈미 총리에게 우정(郵政)민영화는 자민당 총재 선거의 공약이자 내각의 간판 공약이었다. 중의원에서 5표 차로 가까스로 통과한 우정민영화법안이 8월 8일 참의원에서 17표 차로 부결되자, 고이즈미 총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동 법안의 부결을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보통 정치인이라면 법안 심의를 연장하여 정치적 타협을 도모하든지, 아니면 정권의 명운을 건 이상 총 사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집불통의 총리 고이즈미는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고 해산에 반대한 각료 한 명을 파면하면서까지 중의원 해산을 밀어붙였다.

일본에서는 이번 해산을 '자폭해산'이라고 부른다.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우선, 참의원에서 법안이 부결되었는데 중의원을 해산한 것은 일본의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참의원에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참의원은 선거 후에도 구성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한 의원이 에도에서 뺨맞고 나가사키를 치는 격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선거는 자민당의 분열선거를 예고하고 있다. 법안이 부결된 가장 큰 이유는 자민당 내 반발세력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중의원에서는 37명이, 그리고 참의원에서는 22명의 자민당 의원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고이즈미 총리는 반대표를 던진 37명의 자민당 의원에게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자민당의 후보자 수를 늘려야 하는데 오히려 후보자를 솎아내는 대단한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요즘 고이즈미 정권에는 악재들이 즐비하다. 우정민영화법안 부결은 물론이고, 자신이 주창해온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도 거의 물 건너간 상태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 등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가 삐걱거리고 있다. 만약 소문처럼 그가 우파들의 지지 확보를 위해 8월 15일에 신사참배를 강행한다면 좋은 정치적 공격재료를 스스로 야당에 안겨주는 꼴이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이번 선거가 자민당에 유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이즈미가 바라는 대로 우정민영화에 대한 찬반이 최대 쟁점이 될는지도 미지수다.

선거 결과에 따라 일본 정치에는 정치적 폭풍이 불 수도 있다. 만약 일본 국민의 다수가 고이즈미를 전폭 지지하여 자민당 반대파를 빼놓고도 자민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고이즈미의 정치적 위상은 지금보다 높아질 수 있다. 사실상 차기 지명권을 가진 강력한 총재이자 총리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아주 낮게 보인다. 자민당이 '적전 분열선거'를 치르는데다 일부 의원들의 탈당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하지는 못하더라도 공명당과의 연립을 통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민당 패배의 책임은 해산을 단행한 고이즈미에게 돌아갈 것이다. 즉, 고이즈미는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이 경우 '독재형 고집불통'의 집권자였던 고이즈미 대신에 온건파이자 화합형.중재형 지도자가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대거 약진하지만 단독 과반수에 미치지 않는다면 자민당 내 탈당파 의원과 다른 소수정당이 힘을 합쳐 자민당 정권을 넘어뜨리는 '도각 연합'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다. 자민당과 공명당이 힘을 합쳐도 과반수에 못 미칠 경우 가장 가능한 시나리오다.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예상 외로 선전하여 단독 과반수를 확보할 수도 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일본 정치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자력으로 정권탈취에 성공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 경우 일본 정치에는 새로운 변화의 싹이 틀 것이 확실하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