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잡은 보수파 '핵도박'… 이란, 핵 시설 9개월 만에 재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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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8일 중부 지역의 고대 도시 이스파한 인근에 위치한 핵 시설을 약 9개월 만에 전격 가동했다. 유럽연합(EU).미국 등 서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 문제에 관한 강경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중동 전문가들은 "정권 전반을 장악한 이란 내 보수파의 영향력이 극대화되면서 핵 문제를 놓고 서방과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란 보수파의 속셈은=이란은 핵연료 재처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지난 6일 유럽이 제시한 정치.경제 인센티브 방안을 거부한 지 이틀 만에 공을 다시 서방으로 던졌다. 근거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이다. '전력 생산을 위한 핵연료 재처리는 주권국가의 권리'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란이 유엔 안보리 회부와 국제 사회의 제재 경고를 무릅쓰고 초강경 자세를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알자지라 방송은 8일 "국정을 장악한 보수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경 보수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신임 대통령은 6일 의회에서 취임 선서.연설을 하면서 "외부 압력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난해 2월 총선에서 12년 만에 의회를 장악한 보수파는 한 술 더 떴다. 대통령 취임 선서 직후 의회는 "신임 대통령이 핵 활동 재개를 즉각 선언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 이스파한 핵연료 변환 작업 재개가 대외 협상용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EU의 제안서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알아라비야 방송은 "유엔 감시단이 감시장비 설치를 마치자마자 핵 활동 재개를 선언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인 제스처"라고 설명했다. 9개월 동안 멈춘 핵 시설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방송은 "이란도 서방과의 충돌을 피하고 있다"며 "미.유럽에 보다 큰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목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핵 개발 둘러싼 갈등 고조는 불가피=이란의 속셈이 무엇이든 핵 개발을 둘러싼 강경 카드를 제시하면 서방과의 갈등.마찰은 격화될 수밖에 없다. 9일 열릴 IAEA 특별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강력한 수준의 경고를 보내고 대응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이란의 핵 문제가 유엔 안보리에 회부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도 핵 활동 재개에 대한 응징 조치를 예고했다. 이스파한 핵시설 가동 직후 미 국무부는 "이란 핵 문제가 유엔 안보리에 회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과의 핵 협상은 개혁파 집권 시절보다 험난해질 것으로 보인다. 보수파가 장악한 이란 의회와 헌법수호위원회의 압력 아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보수주의자 알리 라리자니를 핵 협상 대표로 임명하는 것도 그런 조짐 중 하나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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