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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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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520년 스페인의 코르테스는 600명의 군대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1531년엔 피사로가 168명의 병력으로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 손쉬운 승리, 그 뒤엔 괴질이란 배경이 있었다. 백인이 묻혀 온 천연두가 인디언 문명을 삼켰다.

원인 모를 전염병은 괴질로 불린다. 인류가 농경을 위해 모여 살기 시작한 1만 년 전에 출현했다. 괴질은 공포 그 자체다. 14세기의 흑사병은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 20세기 초의 '스페인 독감'도 2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21세기 괴질은 중국발(發)이 많다. 2003년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에 이어 2004년 조류독감, 그리고 올해는 돼지 연쇄상구균으로 밝혀진 괴질이 출현했다. 왜 그럴까. 잘 씻지 않는 열악한 위생 환경이 첫째 이유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의료 체계 미비에 있다. 8억 명의 농민 중 90%가, 도시민 중 45%가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다. 10억 명 가까이가 괴질로부터 무방비 상태다.

그러자 중국에선 '맨발의 의사(赤脚醫生)'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바짓가랑이를 걷은 맨발에, 어깨엔 약상자를 둘러멘 문혁 때의 의사를 말한다. "화타(華陀)가 언제 의과대학에 다닌 적이 있느냐" "중국 의사는 전체 인구의 15%인 당 간부에게만 봉사한다"는 마오쩌둥의 두 마디 말로 탄생했다. 자연히 두 가지 성격을 띤다. 첫째, 돌팔이에 가깝다. 석 달 의료 교육으로 급조되기 때문이다. 선판(沈凡)의 저서 '홍위병(Gang of One)'에는 닭 한번 잡아 보지 못한 17세 맨발의 의사가 덜덜 떨며 3세 아이의 팔을 절단하는 수술 장면이 묘사돼 있다. 마오는 그래도 무당에게 기대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또 다른 특징은 도시에 집중됐던 의료 서비스가 농촌까지 미치게 됐다는 긍정적인 점이다. 의료 지식보다는 봉사 정신으로 무장된 맨발의 의사는 산간벽지를 누비며 그곳의 의료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다.

정부는 2일 프리랜서 의사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서울 명의(名醫)가 지방 진료에 나설 수 있게 됐다. 돈벌이가 아닌 인술(仁術)을 펼치기 위해,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한국판 맨발의 의사' 탄생을 기대해 본다.

유상철 아시아뉴스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