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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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로제·샹바르」-프랑스 사람이다. 초대 주한 프랑스대사를 10여년간 지냈지만 오랜 외교관 경력 때문에 행사때 마다 주한 외교사절단장으로 등장, 한국인에겐 더 낯익었던 이름이다.
그가 이제 세상을 떠나 유해로 한국에 돌아온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제2의 고향 한국의 해인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죽어서도 한국에 뼈를 뿌리겠다는 이 외국인의 진정이 돋보인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2차대전 당시 중국에 근무할 때. 일군에 ???다 쫓기는 우리 임정요인이다. 독립투사들을 프랑스 조계에 숨겨주곤 했을 때부터다.
한국에 근무할 때는 한국의 사찰을 즐겨 돌아보며 그 아름다움에 격양을 아끼지 않았다.
화장하여 해인사에 유골을 뿌리겠가는 뜻도 결국 그때 한국불교문화에 심취한 때문이다.
업무관계로 본국에 다녀와선 버릇처럼 서구문명의 비인문화를 비판했고 한국에선 아직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다고 되뇌곤 했다.
한국의 인문적 냄새를 사랑한「샹바르」를 생각하다보면 한국을 사랑했던 또 다른 외국인 인간상이 그리워진다.
영국인 「어니스트·토머스·베델」, 한국 명 배세이다. 일종의 영웅적 인문상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목을 죄기 시작하던 시절, 그는 어느 한국인보다 더 용감하게 일어서 한민족의 편에 서서 정의의 필봉을 휘둘렀다.「대한매일신보」의 설립자였던 그는 결국 일제의 미움을 받고 옥고마저 치렀으며 그로해서 얻은 신병으로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지금 양화진의 외국의 묘지에 묻혀 있다.
요탈 부인의 한국인 평도 인상적이다. 『내가 아시아에서 만난 인종 가운데 한국인처럼 온순하고 착한 민족은 없었다.』
캐나다 사람「스코필드」박사도 생각난다.
한국에 대한 사람과 헌신으로 3·1운동의「제34인」으로 불리는 인물. 파고다공원에서 만세 대열을 따라 전 시가를 누볐으며 겨레의 함성과 일제의 잔학을 필름에 담기 위해 화성 제암리와 평북 선천까지 자전거로 달려갔었다. 12년 동안 한국에 살았지만 일생을 통해 한국을 생각하며 한국을 걱정한 사람이다.
그의 유언도 『한국사회에서 부정부패를 몰아내라』는 당부였고『한국의 양지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숨을 거두고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물론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은 이밖에도 많이 있다.
현대적 서양의술을 우리 땅에 심어준 미국인 「호리스·앨런」(안련)도,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자인 캐나다인「에이비슨」(어비신)도 있다. 신식교육의 사도였던「언더우드」 3대와 「스크랜턴」모자도 있다. 그들의 사명감과 사랑으로 이 땅에서 생을 마친 많은 외국인 성직자들도 기억되어야겠다. 한국은 그들에겐 「제2의 고향」이다.
그들을 생각하며 한국인은 새삼「부끄럽지 않은 한국인」이 되기를 다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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