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최 전남 화순군 동면 오동리|산간마을이지만 우람한 재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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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화순탄광을 오른편에 두고 왼쪽으로 난 갈림길을 따라 5분쯤 오르면 비좁은 산간협곡에 처마를 맞댄 30여가구의 마을이 나타난다.
화순군동면오동리-.
『문헌공(최충)의 15대손되는 천부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이곳 화순에 낙향하셨더랍니다. 그 화순읍내에 살다 그의 증손되는 홍자할아버지가 피난처를 찾아 3O여리 떨어진 이곳 산간으로 찾아들었어요. 보시다시피 농토도 작고 별다른 소득원도 없어 살림은 넉넉지 못했읍니다만 해동공자의 후예답게 살려고 대대로 애는 썼읍니다」후손 재선씨 (61) 의 말. 그의 말처럼 명가의 후예임을 과시라도 하듯 마을 뒷산중턱에는 마을규모에는 걸맞지 않게 우람한 재각이 있다.
임신왜란 당시 의병장 최경회가 이마을은 아니지만 화순읍 삼천리태생. 후손들은 실질적인 시조격인 문혜공 최충과 최경회장군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명문의 긍지를 지켜온다.
삼천리 최경회장군의 형 경장의 집에는 장군이 일본군에 노획했던「청산백운도」란 일본도 한 자루가 지금껏 가보로 전한다.
산간의 논농사가 대농이래야 10여 마지기정도. 그나마 일제때 화순탄광이 개발되면서 사택부지등으로 수용돼 농사보다 약초재배·채취 등으로 어려운 살림을 보태고 있다.10여 가구는 화순탄광에 광부 등으로 취업, 생계에 도움을 받고있다.『크게 출세하거나 돈을 번사람은 없지만 순박한 시골인심 지키며 일가간에 오순도순 살아간다』 는 재선씨는 화순군내 2백여가구를 헤아리는 해주촌씨들의 가장 큰 소망은 군내 곳곳에 널린 의병장 망우회장군 유적지들이 정화돼 조상의 충절이 세상에 보다 널리 알려지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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