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핵폭풍'] 정치권 왜 공개로 기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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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 관계자가 1일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중인 공운영씨를 조사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양영석 인턴기자

검찰이 압수한 274개의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처리 방안을 고심하던 정치권이 서서히 공개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신중론이 우세했던 지난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열린우리당 쪽 목소리가 특히 크다. 1일 오전 상임중앙위원회의 참석자 대부분이 공개에 비중이 실린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미경 상임중앙위원은 "도청 내용 중 불법적인 것에 대해서는 알 권리 차원에서 밝히고, 후속 대책도 나와야 한다는 게 국민의 요구"라고 주장했다. 장영달 상임중앙위원도 "국가안전보장 문제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은 대단히 신중해야 하지만, 정경.권언 유착은 적절한 방법으로 국민 앞에 시원스럽게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세균 원내대표는 "사회적 신망.덕망 있는 인사들이 참여하는 '제3의 검증기구'를 만들어 도청 내용을 검증하고, 처리 방향을 논의하는 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테이프 내용 일부 유출→전면 공개 여론 형성→검증기구를 통한 조사→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최종 처리'의 수순을 상정하기도 한다.

전병헌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가칭 '진실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알 권리와 법률적 판단.한계를 고려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위에서 공개 여부를 포함, 방향.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책이 아닌가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여당 내부의 공개 기류는 이번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 고위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공개하고 공개한 후 내용의 처리도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를 거치자는 의중"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공개에 따른 형평성을 거론한 것도 문제를 덮자는 것이 아니라, 공개할 경우엔 모두 해야 한다는 고민을 표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도청 내용 공개에) 형평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책임 있는 당국자들과 협의하고, 사회적 공론을 들어 가면서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라고 했었다. 여당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공개를 못할 것도 없지만, 공개할 경우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여권의 다른 핵심 인사는 "현 여권은 도청 내용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그룹"이라며 "내용을 공개해도 손해 볼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용 가운데 권력형 비리가 나온다면 당시 집권 세력인 김영삼(YS)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 저질렀을 것"이라며 "일부 야당의 불법 정치자금 등이 나오더라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구 민주당 관계자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여권은 이 밖에 공개를 통해 정.재.관.언론계 등 기득권층의 부도덕한 실상이 드러나면 지지층의 재결집이 쉬워진다는 계산도 하는 것 같다.

여권은 상황이 제2의 대선자금 정국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경우 오는 10월 재.보선과 내년 5월 지방선거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한나라당도 "공개 못할 게 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표는 "공개에 전혀 부담을 갖고 있지 않다. 공개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대연정 제의 거부 기자회견을 하던 중 관련 질문을 받고서다. 박 대표는 "국정원이나, 검찰이나 다 연루돼 있으니 우리는 특검에서 하자고 얘기했다"고 전제한 뒤 "(테이프) 내용에 대해 사생활 부분을 빼고 공개하자는 제의에 대해 부담이 없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여기엔 두 가지 판단이 작용했다고 한다. 우선 공개 불가를 주장할 경우 의혹 대상이 되면서 수세에 몰릴 수 있다는 우려다. 테이프 내용이 주로 DJ와 그 측근들에 관한 것들이고, 부분적으로 YS 정권의 핵심 실세들에 대한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말도 있다. 이 경우 현 지도부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여권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당직자는 "여권에 치명타를 안겨 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현 정권과 DJ 측 사이에 심각한 균열을 불러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한나라당 주도의 대연정' 주장으로 싸늘해진 호남 민심이 완전히 여권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이수호.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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