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천안아오내장터 제암리만행 감추어 지겠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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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나는 1904년생이니까 일제 침략 36년간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다.
1910년은 내가 고향 황해도 백천에서 소학교에 다니던 때다. 그이듬해 늦은 봄 일본의 수비대가 동헌자리에 배치되고 뒤따라 일본 민간인들이 까맣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패전국 점령지에 들어온 군인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털이 시꺼멓게 돋은 넓적다리까지 드러나는 기모노를 펄럭거리면서 닭이라는 닭은 모조리 잡아 먹었다. 돼지를 잡아라, 소를 잡아라 하고 외양간에 매어둔 소까지 끌어내갔다. 골방이나 다락속에 숨어 새파랗게 질려 오들오들 떠는 새댁이나 규수들을 함부로 끌어냈다. 나를 대신 죽이라고 악을 쓰고 항희하는 부모들을 발길로 걷어차고 두들겨 팼다.
3·1운동때 나는 경성여고보 졸업반 재학중 3백명 전교생을 이끌고 나가 만세를 부르다가 검속을 당했다.
검사국의 구류처분을 받고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출감후 나는 즉시 백천 본집으로 내려가 현부 송흥국 등 그곳 청년들과 함께 그 지방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해주지방법원으로 념어가 6개월 징역, 2년 집행유예로 나왔다.
나는 서울과 시골에서 만세 군중이 질서정연하게 행진할 뿐이고 체포하려는 순사나 헌병의 뺨 한대 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해주감옥에 모였던 해주·옹진·재령·장연 등지에서 온 이른바 만세꾼 여성들의 이야기도 나와 마찬가지었다. 소방서 쇠갈구리로 사람을 마구 찍은 것은 일본 헌병들이었다. 음력3윌1일 천안 아오내 장터에서 일어난 일본인의 만행을 들어보라.
헌병 한사람이 만세를 부르던 김상헌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피를 쏟고 쓰러졌다. 헌병들이 발포를 시작했다. 김구응의 가슴에 총알이 관통되어 쓰러지고 탄환은 다시 그의 노모 최부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유중권을 겨냥하던 총알이 명중앴다. 그의 부인 이씨도 남편의 등에 덧업힌채 헌병의 칼에 찔려 무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관순이 부모님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통곡할때 헌병의 칼이 저고리 잔등을 후려갈겨 댕기꼬리가 머리끝에 달린채 댕강 잘려 떨어졌다. 조인원은 한편 옆구리에 총알이 박혀 중장을 입었다. 젊은 여성 박유복은 탄환이 폐부를 관통하여 피를 뿜고 즉사했다.
장마당에는 피투성이가 돤 30여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있었다.
피해 달아나는 군중의 등뒤로 자꾸 쏘아대는 총알에 중상을 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와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의 만세운동 보복 학살사건은 천인공로할 사실이다.
수원읍에 주재하고 있는 수비대가 4월15일 예수교인과 천도교인을 제암리 예배당으로 집합시켰다. 수비대는 오는 사람마다 키를 재어 총길이보다 작은 아이들은 돌려보내고 큰 사람은 무조건 예배당 안으로 들여보냈다. 예배당 문을 밖으로 잠그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생화장을 시켰다.
창을 부수고 뛰어나오던 홍정진은 총에 맞아 현강에서 즉사했다.
잔인무도한 헌병들은 다시 수촌리 마을로 올라갔다.
천도교인 김흥렬의 가족 6인을 포박한 후 볏짚속에 가둬놓고 불을 질러 생화장을 시켰다. 그당시 참화를 당한 인사는 김흥열의 가족 외에 28인이었다.
총독부는 토지조사국을 실치하고 광대한 토지를 관유지로 약탈해서 일본인 및 총독부가 소유했다. 생활 근거지를 빼앗긴 다수의 한국농민은 남부녀재하고 사고무친한 만주와 간도로 떠나갔다.
제땅을 가진 농민들로부터도 공출이라는 구실로 추수를 탈취해갔다.
신사참배는 종교인 탄압뿐이 아니요, 거부하는 시민의 양곡배급까지 정지했다.
내 일생의 반이상이 이같온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며 살아 온 것이다. 어찌 그것이 나뿐이겠는가. 이같은 환경 속에서 온갖 수난을 당한 우리가 이렇게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는데도 일본은 어이없게도 그 참혹한 우리의 역사를 거짓으로 꾸미려 한다. 우리는 이제 다시 그들의 야비한 정신을 고치기 위해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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