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CA 60년 (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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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28수복 후 Y도 앞장서 서울로
YWCA가 중점을 두는 것이 지도자 양성에 있었고, 특히 간사 훈련에 대한 것이 초기 김성실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일할 사람을 기른다는 것은 조직사회에 있어서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YWCA 지도자들은 알았고, 박 「에스터」고문총무도 이 방면에 특별히 마음을 썼다.
그래서 6·25 와중에도 김신자, 김봉화씨를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다음은 김옥주, 박순양씨 두사람을 52년 11월 도미하여 훈련을 받고 공부하도록 했다.
거의 절망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먹고 입고 지내는 것만도 어려운 때 먼 앞날을 생각해서 이런 계획성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린 꼭 기억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수복후에 일은 많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Y는 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53년 전쟁이 끝나갈 때 51년에 미국에 갔던 두 사람, 김현자씨와 김봉화씨가 훈련과정과 학업을 끝내고 돌아왔다.
Y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부의 간사로 김현자씨를, Y틴 부간사로 김봉화씨를 각각 임명하여 새로운 기분, 새로운 의욕으로 일하는 모습은 대견하기만 했다.
일 할 사람을 기르는 일은 해외에 내보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계속해온 일들 중 중요한 것이 지도자 양성이다.
각 지방 Y에서 일하고 있는 간사들을 정기적으로 연합회에서 훈련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새로 채용된 간사들만의 훈련, 5년이상 근무한 중견급에 속하는 간사들에 대한 재훈련, 총무들만의 협의회는 해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신 간사 훈련을 받고 간 10여명 가운데 반수가 다른 기관으로 전직을 한다든지, Y일은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다든지 하는 등등의 이유로 이직할 때는 낙심될 때가 많다.
그러나 한편 한국 여성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실패가 아닌 것이며 Y로서 해야할 일을 했다고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어디에고 가서 훈련된 대로, 훈련 받은대로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국적인 의미에서 인력투자의 효력을 본셈이니까 말이다.
YWCA는 이 기관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도자 양성에 주력할 것이라고 본다.
피난중의 한국 YWCA는 불굴의 정신으로 움직였으며 그러는 가운데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각 지방 Y들도 파괴된 힉관을 복구하면서 전쟁중에 많이 늘어난 고아에 대한 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특히 광주의 성빈여사와 목포의 아동원등은 각각 51년, 47년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수 많은 고아들을 키웠고 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항상 재정부족으로 시달림을 받는 그들을 위해 연합회는 재정적 뒷받침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부족한 상태가 현실인 것이다.
재정면에 있어서 연약한 한국여성들만의 힘으로 한 기관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너무나 힘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비상사태가 어찌보면 YWCA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역설적인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불행한 사태이기 때문에 힘이 뭉쳐질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본다.
파괴된 것을 복구해야 한다는 일념에는 사사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었고, 따질 사이없이 벽돌 하나라도 다시 놓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다.
둘째 많은 의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된 것이다.
멀쩡할 때 누가 도움을 준다면 그건 자존심이 상하게 되지만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또 이런 기회에 도움을 받은 경험은 우리도 다론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과 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주저없이 얄팍한 주머니지만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의 행동을 배웠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우리가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수복은 53년 중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일찍 서울로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가 한밑천 잡아보겠다는 사람들이었다.
YWCA도 부지런한 편에 들어서 안인서, 이동숙씨가 앞서 올라와 구호사업과 복구사업에 착수했기 때문에 Y전체가 이사올 때는 한결 정돈된 회관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초토화된 서울은 보기에 참혹했고 이것이 전쟁이 가져다주는 결과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잠정적인 후전조약에 의한 종전 아닌 종전이었지만 내 고향, 내 집을 찾아올 수 있는 감회 또한 컸다.
다만 다시 이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면서 엄숙하게 수복한 것이 어언 29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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