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경협의 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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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 이상 더 일본에 우롱 당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게 23일 일본측의 한일 경협에 대한 회답을 접하고 받은 느낌이다.
지난 5일 이범석 외무장관이 방일을 결행했을 때「보장 없는 모험」을 걱정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 일본 조야 지도자들은『어려운 입장일텐데 잘 와주었다』는 말로 이 장관의 방일을 반겼고 상당한 국민적 비판을 무릅쓰고 제시된 40억 달러의 한국측 새 제안에「호의적 검토와 반영」을 약속했었다.
그로부터 불과 보름 후 일본측이 제시한 답안에선 한 가닥의 호양정신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의 새로울 것도 없는 응답은 지난 4월 29일 제시했던 15억 달러 ODA(정부개발원조)·25억 달러 수은차관이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15억 달러의 ODA중 30%와 또 25달러의 JEXIM(일본수은융자)자금 중 15%는 내자로 전용해도 좋으며 상품차관요청에 대해선 JEX1M 자금 중 일부를 뱅크론 형식으로 제공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15억 달러의 ODA중 30%를 내자로 전용해도 좋다는 것은 말하자면『15층 짜리 빌딩을 짓는데 필요한 외자는 일단 주겠지만 모자란 내자를 돌려쓰느라고 10·5층 짜리 집을 짓게 되더라도 내 알 바 아니다』란 얘기다.
JEXIM 자금 중 일부를 뱅크론 형태에 의해 내자 충당용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은 일본에서 연간 60억 달러 어치를 수입해 가는 한국이니 그 한도 안에서 수입대금의 일부를 내자로 돌려쓰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른바「야나기야」안에서 달라진 게 별로 없다.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측은 내면적으로 지금의 대응 안 보다는 약간 진전된 △ODA 17억 달러 △상품차관 10억∼12억 달러 △JEXIM 11억 달러의 히든카드를 준비해놓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이번의 회답이 그 히든카드를 내놓기 전의 애드벌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뭏든 항상 침묵 아니면 충분치 못한 브리핑으로 기자들을 답답하게 해 온 외무부의 교섭실무자들도 이번의 일본측 회답을 받고는 얼굴에 분노와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경협은 꼭 성사되어야 하는 것인지, 이런 곡절을 겪고 나서라도 경협이 이루어진다면 정부와 국민은 그 돈을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써야될는지 곰곰 되새겨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한일 경협은 막다른 고비까지 왔다. 한국측에게 더 이상의 대안은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분명한 것은 일본이 한일양국의 장래에 대해 진정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무엇인가 미더운 자세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 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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