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징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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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더도 말고 50대에게 물어보자. 일제 징용이 무엇인가를-.
아마 그는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전율을 느낄 것이다.
어느 학병 거부자의 수기가 있었다.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실록『민족의 저항』. 1943년 한 함양 청년이 겪은 일.
동경에 유학 중이던 이 청년은 형사의 눈초리를 잠시도 피하기 어려웠다. 고국의 산간 벽촌으로 피신을 왔다. 그래도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하늘아, 무너져라! 조선의 땅아 뒤집어져라.』
그 청년의 자학적인 절규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지리산, 덕유산에는 쫓기는 짐승처럼 숨어사는 한국 청년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디 지리산뿐이겠는가. 온 강산에서 그랬다.
일제는 1938년 4월 l일「국가총동원법」이라는 것을 공포했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국가 권력에 의해 확보, 배치하는 정책의 강행. 바로 이 법의 중요한 대목들은「칙령에 정하는 바」에 유보했다.
「령」이란 천황이 마용대로 휘두를 수 있는「도깨비 방망이」같은 것이다.
일제는 이 방망이 하나로 1943년 8윌「징용령」을 시행했다. 먼저「국민등록」의 범위는 남자 45세까지. 이듬해 2월엔 그 범위가 남12세 이상 60세 미만, 미혼녀 12세 이상 40세 이하로 확대. 다시 그해 8월엔「학도근노령」「여자정신대근노령이 내려졌고, 11월부터는 모든 젊은 여자도 징용대상이 되었다. 물론 한국인에게 적용되는 조치들이다. 적용 정도가 아니라 더 악랄했다.
징용이라니, 인간사냥이었다. 일제의 모든 사찰 기능이 동원되어 굶주린 짐승처럼 대상자들을 찾아다녔다.
2차 세계대전 중 일제에 의해 이처럼 징용, 징병된 한국인 수는 통계상 5백만 명에 달한다. 국내 징용 4백 l5만, 일본 등 국외징용 72만명.
전장에서, 혹은 댐 공사장, 광산, 비행장, 도로, 철도건설 등에 이른바「성전수행」이란 구실로 투입된 것이다. 그 수는 l939년이래 1944년 사이에 72만 명이나 된다.
해방당시 일본에 남아 있던 한국인수는 2백 20만 명도 넘었다. 어떤 통계는 2백 40만 명이라고 했다. 그 대부분은 1942년「조선직업소개령」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들이다.
이런 일들은 차라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우리 민족의 불행이고 역사의 비극. 바로 이런 역사를 왜곡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새삼 우리의 아픈 상처를 할퀴는 일이다.
최근엔 그 정도를 지나 우리의 상처에 침을 뱉는 듯한 일본 관리의 강변까지도 듣고 있다. 1944년 이전의 한국인은 일본 국적에 묶여 있었으며, 따라서 강제 징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당장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의, 재일 교포 60만 명은 과연 일본 국적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전후 37년 동안 일본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했지만, 일본인의 의식 수준은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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