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찍었다 하면 30시간 …'죽기살기' 드라마 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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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드라마가 사람을 잡는단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20일 오전 경기도 부천에 있는 SBS 드라마 '패션 70s' 촬영 현장에서 현장을 기록하던 최모(33.여)씨가 쓰러졌다. 병명은 뇌출혈. 최씨는 바로 뇌수술을 받고 현재 중환자실에 있다. 병원 측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주원인은 과로"라고 밝혔다. 한 스태프는 "이런 상황에서 안 쓰러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드라마 촬영장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본지는 현재 시청률 선두권인 '패션 70s'와 MBC '굳세어라 금순아'의 제작 현장을 지난 24일 일요일부터 밀착취재했다.

#"대본 연습? 옛날 얘기죠"

"집에 갔다왔니?"

"세 시간 가지고 어떻게 가. 찜질방에서 때웠지."

24일 오전 8시 서울 강남 B호텔. '패션 70s' 스태프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됐고 얼굴엔 피로가 가득하다. 그래도 성승하 FD(진행 담당)는 "오랜만에 밤샘 촬영이 없었다. 밤에 잠을 잤다는 게 감격스럽다"란다.

26일 화요일 방송되는 20회 대본은 23일 밤에야 나왔다. 몇몇 제작진은 대본을 바탕으로 촬영 스케줄을 짜느라 또 밤을 새웠다. 24일부터 26일 방송 당일 오후까지 쉬지 않고 찍어대야 간신히 시간에 댈 수 있다. 촬영은 A, B 두 팀으로 나눠 동시에 진행된다. 정길영 AD는 "방송 펑크낼까봐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말한다. 기획담당 지상철씨는 "생방송을 하는 기분"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본이 늦게 나오니 따로 대사를 연습하기란 불가능한 일. 촬영 짬짬이 연기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연습이 불충분하니 자꾸 NG가 난다. 이날도 주연 배우가 대사를 계속 더듬었다. 긴장된 분위기 탓인지 연기자의 실수도 더 늘었다. 악순환이다.

# 삼복 더위에 거적 뒤집어쓰기

오후 4시 경기도 부천 야외세트장.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만큼 푹푹 찐다. 그늘이라곤 한 군데도 없다. 날이 환하니 모니터 화면이 안 보인다. 이재규 PD는 빛을 가리려고 거적을 뒤집어쓴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니 본인이야 오죽할까. 가속이 붙은 촬영은 마치 고속철이 달리는 듯하다. 밤 11시 인천서 찍고 다음날 아침 8시 경기도 일산 탄현스튜디오로 옮긴다. 24일 아침 8시에 시작된 촬영은 장소를 네 군데 옮기는 강행군 속에 25일 오후 2시30분에 종료됐다. 30시간이다. 이재규 PD는 말한다. "한번 시작하면 하루 세 시간 수면, 일주일 중 하루 집에 가는 식이다. 먹는 거, 씻는 거, 옷 갈아입는 것 등은 '그까이꺼' 그냥 대충 한다.".

#'그분'이 오신다

26일 새벽 4시. 전날 오후 8시부터 촬영을 재개했으니 어느덧 여덟 시간째다. 촬영이 없는 몇몇 단역들과 스태프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영철 촬영감독은 "그분이 오신다"며 하품을 한다. '그분'이란 졸음이다.

왜 이처럼 몰아서 촬영할까. SBS의 10년차 PD는 "늦어지는 대본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요즘은 방영 후 시청자 반응을 그때그때 소화하는 추세다. 월화드라마의 경우 금요일쯤 다음주 대본이 완성되니 그때부터 몰아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패션 70s'의 경우 편당 제작비는 1억3000만원가량. 이 중 70%가 스타급 연기자의 출연료다. 나머지로 모든 비용을 메워야 한다. 재정담당 박춘호씨는 "인건비.장비비 등 하루 촬영에 드는 비용이 1000만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제작비를 맞추려면 촬영 날짜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일일드라마도 질 수 없다?

지금까지 일일드라마의 촬영은 여유가 있었다. 최소 6개월은 끌어야 하는 만큼 미니시리즈처럼 매일 밤샘촬영을 해서는 장기전을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그런 상식도 무너졌다.

24일 밤 10시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기자촌 주택가. '굳세어라 금순아'를 한창 촬영 중이던 스태프 사이에서 "아~"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길 한켠에 주차돼 있던 차가 빠져나가서다. 장면 중간에 배경 속 자동차가 갑자기 없어져 버린 꼴이다. 처음부터 다시 찍기엔 시간도, 기운도 없다. "옥의 티지 뭐."

밤 11시쯤 구산역 근처 놀이터로 옮겨 계속된 촬영은 새벽 2시30분에야 끝났다. 오전 7시 약수동 사무실에서 시작해 연신내 공사장, 청담동 미용실, 흑석동 약수터 등을 거쳐 19시간30분 만에 끝난 것이다. 25일 오전 9시 여의도 한 커피전문점에서 촬영이 재개됐다. 같은 시간 여의도 MBC 종합편집실은 음향.자막처리 등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하다. 이대영 PD는 "일정이 쫓기긴 하지만 방송시간까지 편집을 못 끝내 중간에 테이프를 갈아끼우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신입사원'은 마지막회를 내보내면서 무려 4개의 테이프를 갈아끼우는 기록을 세웠고, 이 때문에 담당 PD가 징계를 받기도 했다.

글=이지영.최민우 기자, 박조은.양정근 인턴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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