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영 4년반동안 보고 느낀 노제국의 명암 장두성 특파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새로운 정당이 생겨 난다는 것은 영국처럼 오랜 양당체제가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게 지내온 나라에서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81년3월26일 사민당(SDP)이 창당대회를 개최한 코노트식당 앞은 그래서 대단히 혼잡했다.
이 행사를 취재하러 갔던 기자는 한국적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한가지 사실을 여기서 발견했다. 영국정계에 돌풍을 몰고 올 것 이라고 모두들 흥분해서 주시하고 있는 이 신당발족이 체제면 에서 전혀 정비가 안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우선 당을 대표할 당수도 없고, 최고위원 같은 것 도 없었다. 당헌도 없었다. 창당을 주도한 정치인들 10여명이 공식직함없이 나와서 기자회견 하는것이「창당대회」의 전부였다. 회의는 사회도 없이 진행 되었다.
당기도 없고, 당가도 없고, 축사나 선서식같은 의식의 절차가 전혀 없었다. 당수는 차차 뽑겠다고 발표 했는뎨 1년이 지난 지금에도 SDP는 당수가 없다. 당환은 창당 8개월만에야 제정되었다.
그러나 창당 1년3개월이 지난 오늘 SDP는 당세를 착실히 굳혀 중간선거에서 양대당을 모두 앞질렀고 다음 총선거에서는 연립정부의 일원이될 가능성이 확실해지고있다.
거사를 하되 거창한 형식을 앞세우지 않고 실질적 문제를 하나씩 풀어감으로써 토대부터 쌓아 울라가는 영국인의 실용주의는 얼핏보면 어설프지만 대단한 저력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영국에서는 용두사미라는 말이나 현상이 있기 어렵다.
이런 측면을 유럽대륙사람들, 특히 프랑스사람들은 『영국놈들, 철학이 없다』고 욕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영국인들 스스로도 그런걸 욕으로 생각지 않고 맞장구를 친다.영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해『우리는 진흙탕을 걸어가듯 되는대로 해나가는 버릇이 있다』(Mudding Through)고 말한다.
18세기 19세기에 대제국을 세울 때 무슨 청사진을 갖고 시작한 줄 아느냐? 우리 상인들이 곳곳에 회사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하니 군대가 뒤늦게 가서 그걸 방어해 줬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 해지는 때가 없는 대제국 판도가 서 있더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를 하나씩 풀어 나가면 전체구조는 스스로 만들어 지며 그래야 무리가 없다는 귀납적 접근방법을 영국인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 정치인「솔즈버리느혜는 이런 특성을 정치에 적응해서『위대한 사람이 특정 이론에 도취되면 숙취를 앓는것은 소인들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특성이 정치술로 이용될때 가끔 냉소적인 비관을 받기도 한다. 한 영국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우리 정부가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처리하는지 아는가? 왕립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나서 손을 턴다』
정부 밖에 있는 인사들로 그때 그때 목적에 따라 구성되는 왕립조사위원회는 오랜 기간을 두고 청문회를 연다. 그리고 한 1년쯤 걸려서 청문회 내용을 간추려 보고서를 제출한다.
청문회에서 모든 관련자들이 마음껏 비판을 하고 욕을 하고 또 그 말이 성실하게 보고서에 기록되니 당사자들은 우선 불만해소가 된다. 그리고 보고서가 나올때쯤 이면 그 문제는 국민들의 관심 밖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정부는 별 대책도 세우지 않고 조사위원회 구성만으로 우선 위기감을 해소하려드는 버릇이 생겼다고 비관한다.
그러나 왕립위윈회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 할 수도 있다. 급하다고 우선 대책부터 세우는 행동이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 위험이 많은데 비해 우선 진상부터 차근차근 밝혀보고 그걸 토대로 대책을 세운다면 질 수가 없다.
지난해 영국 각도시에서 실업자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정부의 대책은 소위「스카먼」왕립위윈회를 구성하는데 그쳤다.
이 경우 좀 서둘렀기 때문에 보고서는 6개월만에 나왔다. 실직자들, 인종차별을 받아온 유색인들의 불만을 자세히 열거하고 또 이들에 대안 경찰의 차별적 태도를 자세히 지적한 이 보고서는 폭동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문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폭동에 가담했던 측에서도『이만하면 우리가 할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고 흐뭇해하고 있다.
원칙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특성을 일부에서 비능률적 이라고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마지막에 웃는자」가 되게 하는 고도의 정치기술로 영국인들은 이 특성을 다듬어온 것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