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56. 미국 체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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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와 영화 출연으로 한창 인기가 치솟던 시절의 필자.

미국 순회 공연에 앞서 캐나다 토론토에서 공연이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 '환영 배삼룡'이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몇 해 전 미주 공연 때 알게 된 한인회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양복 한 벌에 단돈 1달러70센트, 내가 가진 전부였다. 그들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민일보라는 신문사에서 우리 공연 티켓을 모두 샀다는 것이다. 인민일보는 교포가 운영하는 좌익계 신문이었다. 상당수의 티켓은 예매된 상태였다. 나는 결심했다. '비록 외국이지만 처신을 똑바로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공연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한보다 북한과 더 가까워 보이는 단체의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신문사 측은 매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공연 홍보와 흥행을 위해 그들은 '배삼룡'이 꼭 필요한 처지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인민일보 측에서 간부를 보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그는 요구 조건을 물었다. 나는 "무대에 태극기를 걸고 한국 영사를 참석시켜라. 그리고 배우들은 무대에서 애국가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신문사 간부는 "공연 무대에 무슨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까지 부르느냐"며 황당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공연장에 태극기가 걸렸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애국가와 '고향의 봄'을 불렀다. 그리고 영사도 공연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캐나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공항에는 꽤 많은 팬이 나와 있었다. 공연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주머니 사정도 조금 나아졌다. 교포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에서 출연 제의를 해왔다. 순회 공연이 없는 날 밤에 나는 나이트클럽 무대에 섰다. "어, 정말 배삼룡이네."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은 고국의 코미디언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워했다. 얼마 후 공연단은 모두 고국으로 떠났고, 나는 뉴욕에 남게 됐다.

뉴욕은 너무 복잡한 도시였다. 강원도에서 자란 내 생리에는 특히 맞지 않았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겼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교포가 숙소를 구해 주었다. 이런저런 무대에 서면서 생활비를 벌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훌쩍 석 달이 흘렀다. 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비자와 여권의 만료일이 닥친 것이다. 그때 비자와 여권의 유효 기간이 3개월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귀국할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 내게 떨어진 연예활동 정지 처분은 그대로였다. 정말 애가 탔다. 밤에는 잠도 안 왔다. '이렇게 가면 꼼짝없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텐데'. 시간이 갈수록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비자 만료일이 2주가량 남았을 때였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코리아타운에 있는 백화점에 들렀다. 느긋하게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뒷걸음질치던 나는 어떤 사람과 등이 부딪혔다. "어머나, 죄송합니다." 돌아보니 미모의 한국 여성이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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