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8화 YWCA 60년|농촌 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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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22년 대한 (조선) 여자기독교 청년회 창설과 더불어 김필례씨를 필두로 하여 신의경·유각경씨 등은 지방순회를 하며 지방조직에 역점을 두었다. 이때 회원이 된 지방 YWCA는 청주·서울·대구·선천·광주 등이었다. 학생YWCA는 개성호수돈· 마산의신여학교·정신여학교·이화학당·협성여자성경학교·동대문부인병원 간호원양성소·원산신정여학교·원산여자성경학교 등이었다.
이화학당의 경우 이문회라는 명칭의 학생회 조직이 있었다. 한국YWCA가 조직되면서 이미 있었던 학생회인 이문회를 이화학당 학생기독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꿨다. 그래서 1922년에 이화학당 학생YWCA가 조직된 것이다. 첫 회에 소개되었던 YWCA회가는 이화의 이문회가 사용하던 회가라고 한다. 가사는 한학자 정인보선생이 쓰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 가사를 이화학당 YWCA회가로 하는 동시에 한국YWCA회가로 했던 모양이다.
당시 학생Y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었던 것은 농촌계몽 운동이었다. 농촌운동에는 영원히 기억되어야할 한 사람이 있다.1930년대 젊은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씨다. 그가 한 일은 그리 큰일이 아닐지 모르나 그는 한국 농촌운동의 선구자요 모델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1929년 제7회 총회에 협성여자성경학교 대표로 최용신씨는 참석했다. 그때 그는 농촌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l931년 10월, 샘골에 한국YWCA는 열아홉의 꽃다운 처녀 최용신양을 선생으로 파견했다.
3년만에 그 꽃이 떨어지게 될 줄이야 누가 예상했으랴. 그는 부족한 예산으로 자그마한 학교 교사를 마련하는데 너무나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국어· 산수· 수예등 몇 과목을 가르치면서 몇 달에 걸쳐 교사를 짓고 난 최용신은 몸도 지치고 한국YWCA가 보조해주던 예산조차도 회의 사정으로 끊기게 되어 정신도 지친 상태였을 것이다. 이처럼 지친 상태에서 최씨는 1935년1월 세상을 떠났다.
농촌계몽운동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YWCA의 중요한 프로그램이며, 특히 학생YWCA는 매해 학교마다 방학이면 농촌에 나가서 한글·위생등을 깨우쳐주는 프로그램을 했다.
필자가 1931년 이화여전에 입학했을 때는 각 학생YWCA가 활발히 움직일 때였다. 당시 학생YWCA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농촌계몽을 나가는 것이 제일 큰 일의 하나였다. 농촌계몽과 더불어 문맹퇴치가 주류를 이루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에 좀더 과학적이고 영양에 유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필자도 4학년때 농촌계몽대에 직접 참가했던 귀중한 경험이 있다.
4학년생 중 희망하는 이들을 2명 또는 3명을 한팀으로 하여 3주 동안 나가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갔던 곳은 지금은 서울시에 편입된 오류동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그곳을 농촌으로는 상상도 할수 없을 것이지만 해방직전 까지도 서울과 그렇게 가까운데 있건만 벽지와 다를바 없는 농촌이었다.
그때는 온천이 있었으나 일본사람들만이 갈수 있었다. 그것 이외에는 농가가 약30가구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서울을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때 그곳에는 입교대학 출신으로 농촌에 뜻이 있어 그곳을 평생 사업장으로 택하여 사는 송두헌씨라는 분이 있어 우리에게 집을 제공하고 우리들이 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 그의 가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둘이었다 .익숙지 않은 농촌생활에 많은 고생을 했지만 송두헌씨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수 없었고 그는 마을사람들을 위한 젓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 희생정신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귀한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 자신도 농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신기함과 그곳 아이들·부녀자들의 소박하고도 무엇이든지 가르쳐주면 배우겠다는 자세가 되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감격이 컸다. 솔직이 말해서 공부합네 하고 실생활에 대해서 무엇을 알기에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한글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서 노래도 가르치는 것 정도는 할수 있지만 젊은 여성들에게 어떻게 살림을 살고 어떻게 시집 식구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가질 것인가 같은 일은 책을 좀 뒤져보고 갔지만 사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이때 나의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으며, 주고 온 것보다는 얻어 가지고 온 것이 더 많았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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