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6) 제78화 YWCA 60년(2) - YWCA의 태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국YWCA 창설자로 알려진 김필례씨·김활난 박사·유각경씨는 모두 기독교의 배경 속에 태어나 일찌기 새로운 교육을 남 먼저 받을 수 있었던 여성들로, 그들 자신들도 그 특전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릴 때부터 사물을 보는 눈이나 판단능력이 남달랐던 것 같다.
특히 같은 여성으로 기회를 얻지 못한 수많은 한국의 여성들을 위해 교육을 해야겠다는 사명감과 의무감에서 교단에 선 것은 물론, YWCA같은 여성기관을 조직하여 학교교육 외에 사회교육의 터전을 삼고자 했던 것이다.
김필례씨는 16년 귀국하여 2년간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오라버니(김필정씨·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으로 사내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알려진 세칭, 선천「1백10인 사건」에 관련되어 만주로 망명하였음)의 소개로 세브란스출신인 의사 최영욱씨와 결혼, 시댁인 광주로 가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가 시집살이를 한데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였다. 그의 말을 직접 빈다면 「하나의 사업」이었다.
당시는 신식공부를 한 여성을 「신여성」이라 했다. 「신여성」은 어디를 가나, 어떤 일을 하나 모든 사람이 주목을 했다. 보통여자가 한 것이라면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을 「신여성」이 하면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김필례씨는 「신여성」도 시집살이를 이렇게 훌륭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있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홀시어머니는 6명의 전실아이와 자기가 낳은 아이 둘 합해서 8명의 자녀를 훌륭히 길러낸 모범적인 분이었기에 그 시어머니께서 하신 대로 쫓아하기는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음식하는 것, 바느질이 모두 익숙하지는 못했지만 굳은 의지와 투철한 목표를 가졌던 그는 어려운 시집살이를 빈틈없이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 대한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다른 불우한 여성들을 도울만한 일이 없는가를 생각했다.
개화기의 물결을 타고 많은 젊은 남자들이 외국유학을 갔다.
그들 대부분은 연상의 아내를 가진 사람들로, 그 아내들은 신식공부는 물론 글이라고는 전혀 배워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외국에 있는 남편에게서 편지가 오면 답장은 물론 할 생각조차 못하거니와 읽을 수도 없으니 이건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자연히 부부의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유학하고 있는 당지에서 그곳 여자와 다시 결혼을 하든지 같은 한국여성으로 유학가서 공부하는 여자들과 결혼해서 사는 그런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김필례씨는 주위에 그런 곤란한 처지에 빠진 많은 여성들을 볼 수가 있었고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그런 여성들을 위한 야학을 시작했다.
이것을 알게된 김필례씨는 그 일을 돕기로 했다. 낮에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밤이면 야학에 나가 무식 때문에 불행을 겪는 여성들을 위해 글을 가르쳐주고 편지를 읽어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미 그는 YWCA 사업을 시작한 셈이었다.
결혼 l년후 아들을 낳았는데 1년쯤 후 불행하게도 아기가 죽었다. 아기의 죽음으로 남편은 실의에 차있었다.
더 견디지를 못한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김필례씨는 그동안 서울을 자주 오가면서 YWCA조직을 위해 준비할 것을 마음먹었다. 처음 그는 그가 잘 아는 정신여학교에 있는 선교사 루이스 교장에게 가서 어떻게 하면 YWCA를 조직할 수 있겠느냐고 의논했지만 그는 YWC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으로 만난 사람이 이화학당 당장인 아펜젤러였다. 그는 YWCA를 잘 알고있었고 한국에 YWCA를 창설하는 일은 절대찬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상당히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르치고있는 김활란씨를 소개했다.
이렇게 알게된 두 여성선각자는 연령에 있어서 김필례씨가 7세 위로 차가 있었지만 그 생각에 있어서는 동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22년3월에 중국 북경 청화대학에서 열렸던 세계기독교 학생대회(WSCF)에 김필례씨와 김활란씨가 참석하게 되었다. 김필례씨는 장로교파의 대표로 갔고, 김활란씨는 감리교를 대표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