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위기의 노부부, 그리고 딸 … 어찌 하오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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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여보, 나 좀 그만 괴롭혀

Q. (남편이 화만 낸다는 70대 주부) 고집 센 남편은 본인이 하는 말을 법처럼 생각합니다. 만약 뜻을 거스르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냅니다. 그런 남편 비위 맞추느라 평생 꼭두각시처럼 살다보니 이 나이까지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어요. 참고 살려니 내 인생이 너무 비참합니다. 이젠 화병에 불면증·우울증이 도져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병원에 다닙니다. 그런데 남편은 병원 가는 것까지 문제 삼습니다. 밥 해주고 심부름해야할 시간에 무슨 태평하게 병원이냐는 거죠. 이제라도 갈라서 남은 인생이라도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A. (집에서 꽉 잡혀 산다는 윤교수) 속 마음을 이렇게 꺼내보였으니 일단 다행입니다. 마음 속 문제를 털어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한 번쯤 이렇게 괴로운 속내를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련해질 뿐더러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을 받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수순이니까요. 이렇게 마음을 여는 걸 전문용어로는 심리학적 용기라 합니다.

이런 사연을 들고 병원을 찾는 아내, 정말 많습니다. 자녀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오히려 그 나이에 무슨 이혼이냐고 핀잔만 준다죠. 하지만 삶이 얼마가 남았든, 아니 오히려 상대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감성 만족이 더욱 중요합니다. 젊을 땐 자녀 양육 등 가족 생존을 위해 감성적인 면을 희생하고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인생 원숙기인 60~70대가 되면 생존이 아닌 사랑에 대한 욕구가 다시 늘어납니다. 단지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니니까요. 또 이렇게 열심히 희생하고 살았으니 내 마음에 보상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죠. 노년일수록 더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늘어나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더는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귄위적인 남자일수록 역설적으로 아내에 대한 의존심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깐 동안도 아내가 없으면 분리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내만큼 나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는데, 그 아내가 멀어질 것 같아 더 통제를 하려고 드는 거죠.

02 내가 더 많이 참는다고

Q. (아내에 이끌려 병원에 온 남편) 아내 요구로 전에도 정신과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내 왈, 남편이 부드럽게만 대해 주면 다 낫는 병이라며 의사 앞에서 내 흉을 보는데 너무 창피했습니다. 게다가 의사도 합세해서 같이 몰아붙이니 말이죠. 그런데 정말 억울합니다. 아내를 무시하기는커녕 이제 사회적 지위도 별볼일 없어지고 늙은 나를 아내가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연히 식당에 갔다가 몇 살 어린 후배 부부들과 함께 식사하는 아내를 봤는데, 후배 남편한테 생글생글 웃는 아내 모습에 기가 막혀 자리를 떠났습니다. 친구들끼리만 골프 친다더니 남자도 끼어서 골프 치고 밥까지 먹다니.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금까지 그냥 모른척 참고 있습니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아내는 계속 내 흉만 보니 괴로운 건 저입니다. 심지어 툭하면 이혼 이야기를 꺼내니 화가 나다못해 걱정도 됩니다. 아내의 이혼 타령을 줄일 방법은 없을까요.

A. 아내가 남편을 이끌고 정신과를 찾는 건 실은 의사에게 뭔가 바란다기보다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욱, 하는 남편도 있죠. 아내는 괴로움을 호소하고, 괴로운 얼굴로 한숨만 쉬던 남편은 “그만하라”고 버럭 하죠.

  이런 땐 나이 들수록 감성이 더 섬세해지니 아내에게 더 따뜻하게 대해 달라고 말합니다. 아내 편을 우선 드는 거죠. 그리고 따로 따로 만나자고 합니다. 한 번 끌려온 것도 싫은데 또 올까 싶지만 의외로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 남편이 많습니다. 재밌는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란 이야기를 꼭 하는 겁니다. 남편이 와서 주로 하는 얘기는 오늘 사연과 비슷합니다. 아내가 저렇게 불만스러워하는 건 정말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늙어 매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무시하는 거라는 주장이죠.

  정리해보면 아내는 지금까지 참고 살았으니 이젠 좀 남편 보고 따뜻하게 대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고, 남편은 이를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약해져 아내가 불평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이런 갈등의 골이 깊습니다. 실제로 결혼 20년차 이상의 황혼 이혼은 이미 2012년부터 결혼 4년차 이하 초혼 이혼을 앞섰습니다. 2012년 황혼이혼은 3만234건, 초혼 이혼은 2만8204건이었으니까요. 황혼 이혼 사유는 경제문제(12.7%)나 가족불화(7%), 정신적·육체적 학대(4.2%) 등도 있지만 성격 차이가 47.2%나 됩니다.

  성격이란 대인 관계에서 일정하게 나타나는 한 개인의 심리 패턴입니다. 물론 개인별 특징도 있지만 남자와 여자란 다른 성이 갖는 성격적 특징도 존재합니다. 황혼 이혼을 막는 가장 쉬우면서도 명확한 해결 방법은 남녀 심리 반응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상대방이 나를 공감하고 이해해줘야 살맛이 납니다. 반면 남성은 상대방이 나를 최고라 인정해 줘야 살맛이 납니다.

  자, 남편은 아내가 이야기할 때 30분만 진지한 얼굴로 경청해 보세요. 아내가 불평을 얘기하면 아마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겁니다. 나를 무시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내는 그 불평을 이야기해야 남편이 나를 공감해 준다는 생각에 이혼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납니다.

03 난 엄마가 아닌데
Q. (부모 갈등에 스트레스 받는 돌싱) 29살 돌싱 딸입니다. 최근에 이혼을 했습니다. 아이는 없고요. 이혼 후 아버지가 집에서 재택근무 형태로 혼자 꾸리고 있는 한 금융 비즈니스를 돕고 있습니다. 어차피 외로운 차에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더군요. 일단 두 분 사이가 안 좋으니 그걸 보는 게 힘듭니다. 또 아버지가 점점 저한테 의존하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덜 보이는 것 같으면 사장 자격으로 혼내는 건 물론 아버지로서 섭섭해 합니다. 그래서 이제 따로 살아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그리고 부모님 사이를 좋게 할 방법은 없는지도요.

A. 아내와 사이가 안 좋으면 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딸이 그런 아버지를 잘 받아주는 건 분명 효(孝)지만 부모 두 사람 사이를 더 멀게 만들기 쉽습니다. 딸이 아내 역할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제일 좋은 건 부모와 떨어져 살되 근처에서 사는 것이지요.

  사이가 멀어진 부모 사이를 좋게 하려고 공연 티켓을 사거나 여행예약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납니다.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데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오히려 싸움으로 번져 버립니다. 진짜 화해하려면 상대를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두 분이 함께 뭘 하라고 서두르지 말고 각자 취미 등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하도록 도우세요. 그러다 보면 분명 상대를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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