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지어 끈을 다이어리 밴드로 쓰는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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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김한 대표는 “유럽 문구시장은 아시아 회사를 하청 업체로 생각한다”며 “제품력과 브랜드를 인정받을 때까지 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했다. [신인섭 기자]

6일 오후 경기 일산 킨텍스에 열린 16회 대한민국디자인대상에서는 의외의 수상자가 나왔다. 디자인경영부문에서 중소기업 ‘7321디자인’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하고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관하는 디자인경영대상은 1999년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LG전자, 현대자동차, LG생활건강, 리바트, 애경, LG하우시스 등 대기업이 받아온 상이다. 연매출 41억원, 직원 30명인 소기업의 수상은 이례적이다.

 수상식을 이틀 앞둔 지난 4일 경기 파주시 7321디자인 사옥에서 김한(49) 대표를 만났다. 그는 “예산이 있어야 움직이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열정만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어 가능성이 크다”고 말문을 열었다.

 7321은 11년 전 창업 당시 ‘7년 후 3월21일에는 좋은 회사가 돼 있자’라는 김 대표의 염원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제일기획에서 7년간 근무한 후 퇴사한 그는 2003년 자기 브랜드를 갖고 싶다는 열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첫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동물 캐릭터를 입힌 달력을 만들어 11월 첫 주에 3만 개를 팔았다. ‘이 추세면 연말까지 30만 개 팔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30만 개를 만들었지만 열흘 만에 판매가 뚝 끊겼다. 달력 시장은 11월에 끝난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었다. 한순간에 3억원의 빚을 떠안고 7명의 직원을 내보내야 했다.

 “디자인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큰 착각이었죠.” 디자이너였던 김 대표가 사업가로 거듭난 게 바로 그때다. 김 대표는 홍대 은하수 다방 자리에 있던 사옥을 팔고 일산 자택으로 들어갔다. 맨몸으로 공장을 돌아다니고 업체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인맥을 쌓았다. 제품 납기일을 맞추고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협력사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걸 깨달아서다. 그는 그때를 “디자이너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닥치는 대로 경험하고 듣고 배웠던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이후 김 대표는 고교생~20대를 타깃으로 ‘추억을 팔자’라고 생각했다. 앨리스·도로시·어린왕자 같은 오래된 동화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다이어리와 노트·여권지갑·여행가방 등을 만들기로 했다.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노트를 360도로 꺾은채로 필기해도 갈라지지 않는 ‘붙은등 기법’을 개발해 특허를 냈고, 300쪽이 넘는 다이어리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지엽사를 찾아다니며 장당 100g인 종이 대신 80g짜리를 찾아냈다. 다이어리를 감싸는 고무줄(밴드)은 늘어나지 않도록 브래지어 끈을 이용했고, 표지는 질긴 장판 소재를 사용했다. 경계를 넘나드는 소재 선택이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 덕에 2005년 처음 출시한 앨리스 다이어리는 12만 권 팔렸고, 다음해 10월에 내놓은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다이어리가 4개월 만에 14만 개 판매됐다. 2007년 첫 선을 보인 어린왕자 다이어리는 지금까지도 매년 10만 개 이상씩 꾸준히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다. 해외 시장에서도 러브콜이 왔다. 스페인 엘코르테잉글라스, 방콕 파라곤, 중국 지우광 백화점 등에 입점했고 미국의 모마샵, 앤소로폴리지 등 유명 매장에서 7321디자인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이제 생활용품과 디자인문구를 넘어 출산용품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다이어리에서 출발해 여행가방, 스카프, 텀블러로 제품을 한 단계씩 확장해왔듯 새 시장 진출도 차근차근 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지난 11년은 한 계단씩 오르는 시간이었다”며 “처음부터 거창하게 사업을 하려 하지 말고 작은 리스크를 여러 번 나눠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글=채윤경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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