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날·가정의 달] '얘들아, 영어만 배우지말고 코스모폴리탄이 되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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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기러기 가족의 이야기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기러기 가족은 대가족.핵가족에 이은 또다른 가족 유형이 돼버렸다.

그러니 기러기 가족의 유학 성공기에 눈길 갈 독자들도 많아졌다. 이 집은 외국 나가서 어떤 고생을 거쳤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데 공무원 출신 아빠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떠난 유학이라니. 치맛바람 엄마들 못잖은 열성 아빠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아버지 엄승용씨가 영국에서 보인 '바짓바람'은 한국에서 돈 보따리 싸들고 고액 과외반에 넣으려고 안달하는 부모 모습과는 다르다. 돈보다는 따스한 배려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정원이 찬 좋은 공립학교에 아이들을 넣기 위해 행정관리와 지역 인사들을 설득하고, 엄마를 대신해 따뜻한 저녁밥 차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 아빠였다. 그것도 자신의 석.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들과 대화하고 고민에 귀 기울여 주는 아빠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학교 다니는 게 행복해요"라는 말과 함께.

영국의 공립학교는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 따라서 엄씨네 이야기는 영국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에 아이들을 맡기고 보자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유학 형태와는 다르다.

돈은 안 들이되 아이에게 다문화 경험을 갖게 해주자는 것이 아빠의 목표였을 뿐이다.

한국 부모들은 '돈보다는 사랑'이라는 원칙을 알면서도 아이가 거쳐야 할 경쟁에 숨이 막혀 가끔씩 이성을 잃어 버린다. 그러니 중산층 가족들이라면 돈으로 성적과 경험을 산 게 아니라 부모의 관심과 아이들의 노력으로 목표한 바를 이뤄낸 엄씨네 모습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에서의 엄씨도 보통의 한국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밤 9시에나 귀가하는 아빠, 집 밖에는 만화방과 PC방이 널려 있는 환경. 아빠가 술 약속을 멀리하고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과자 사주고 비디오나 빌려주는 것. 오히려 아이들의 생활 리듬을 깨기 일쑤였다.

게다가 아내가 직장 일과 가사에 허덕이는 것도 그저 엄마의 책무이겠거니 당연하게 여겨왔다. 이때 아빠는 결심했다. 우리 가족은 변해야 한다고.

그러고는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났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반응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공부하러 온 사람이 어떻게 애들까지 키우느냐는 교수의 불만스러운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초스피드로 저녁상 차리는 법도 익히고, 아이들과 대화하는 법도 배워가며 영국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영국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소극적인 윤수도 태권도 대회에 나가 자신감을 갖고, 편가르기 싸움으로 번지곤 하던 저녁 자리가 진지한 토론의 장으로 변모하며 세 아이들은 조금씩 커갔다.

가정에서 학구적 분위기를 만들어 주라며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국 교사들, 아이들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북돋아 주는 학교 시스템 등 엄씨네는 영국에서의 3년간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돌아왔다.

이제 귀국한 세 아이가 한국 교육 시스템에도 안착했다며 아빠는 책을 통해 자랑스레 전하고 있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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