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북·미 양자회담 성사시킨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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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의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와 북한 외무성의 김계관 부상이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6자회담 재개에 합의하게 된 데는 중국의 절묘한 외교적 테크닉이 한몫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워싱턴과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9일 저녁 중국의 한 외교시설에서 만찬을 겸해 열리기로 돼 있던 모임에는 원래 3자가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호스트(주최) 격인 중국이 미국과 북한 대표를 불러 함께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동안 미국은 6자회담의 틀 밖에선 절대로 북한과 양자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물론 국무부 실무자들이 뉴욕에서 북한의 박길연 유엔 대표부 대사 등과 만난 적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상호 간의 입장을 확인하는 자리'로 성격을 규정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아무리 베이징에서라도 미국이 북한 측과 단둘이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이 중간에 끼여 있다는 명분으로 힐 차관보는 편안하게 김 부상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스터리는 그 다음부터다. 회담장에서 중국 대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북한의 조선중앙TV는 9일 밤 긴급 뉴스를 통해 "6자회담의 조.미 단장 접촉이 진행되었다. 6자회담 단장들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부상 김계관과 미 국무성(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이 7월 9일 베이징에서 만났다"고 보도했다. 미 국무부도 하루 뒤인 10일 단둘이 만났음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국무부는 "두 사람은 '협상(negotiation)'을 한 게 아니라 외교적인 메시지를 교환했을 뿐"이라며 양자 회담 불가의 원칙을 깬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했다. 또 "힐 차관보는 그동안 국무부의 디트라니 북핵 특사가 뉴욕에 가서 한 것과 비슷한 말을 했을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달라 보인다. 북한의 김 부상은 "북한의 핵무장 해제와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을 맞바꾸자는 미국의 제안에 대해 응답하겠다"는 뜻을 힐 차관보에게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힐 차관보도 "우리는 (6자회담에서) 결투 연설이 아닌 성과를 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면서 "해결 지향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춰 대화했다"고 워싱턴 포스트에 말했다. 단순한 외교 메시지의 교환이 아니라 사실상 회담, 또는 협상이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회담장에서 중국 대표가 사라져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워싱턴과 베이징 외교소식통의 분석이다.

우선 미국의 입장에선 당초 중국이 참석하기로 돼 있었으니 '양자 회담 불가'의 원칙을 어긴 게 아니다. 또 북한은 미국과 둘이서 만났으니 양자 회담을 한 셈이다. 결국 중국은 미국과 북한의 체면도 세워주면서 실리를 논의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고도의 외교적 테크닉이다.

워싱턴.베이징=김종혁.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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