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45. 아버지 소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 TV 출연으로 한창 인기를 누리던 시절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필자.

방송국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팬들만이 아니었다. 별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래서 연예인들은 종종 황당한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TV에서 한창 인기를 끌 때였다. 방송국 복도에서 기자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다섯 살쯤 된 사내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보며 "아버지"하고 불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아이는 다시 나를 똑바로 보며 "아버지!"하고 더 크게 불렀다. 옆에 섰던 기자들이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난생 처음 보는 아이가 다짜고짜 아버지라고 부르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아니에요. 나는 처음 보는 아이요."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게 번득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진짜 아니라니까 그러네." 옆에 있던 기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네 아버지가 맞니?" 아이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누가 네 아버지라고 했어?" "우리 엄마가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경비실로 갔다. 기자들도 따라왔다. "이 아이 보호자를 찾아주시오." 사내 방송이 나갔다. 이런저런 옷차림을 한 사내 아이의 보호자를 찾는다는 방송이 쩌렁쩌렁 울렸다. 20분쯤 지나서였다. 어떤 부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동수야." "엄마아." 뒤에는 안면이 있는 MBC 전속 무용수가 서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인은 연방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제야 기자들도 나를 믿는 눈치였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왜 '아버지'라고 불렀는지가 궁금했다. 부인의 얘기는 이랬다. 그는 서울 아현동에서 외아들을 데리고 사는 과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화투를 치곤 해요. 그런데 TV에 배삼룡씨가 나올 때마다 친구들이 아이에게 "네 아버지 나온다"고 농담을 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TV에 배삼룡씨가 나올 때마다 아이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더라고요." 아이는 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과 방송 시간까지 줄줄 꿰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이리저리 행방을 찾고 있는데 MBC 무용수로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아들이 방송국에 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를 보여주겠다"며 친구들을 데리고 방송국까지 찾아온 그 아이가 측은했다. 그래서 손을 잡고 근처 가게로 갔다. 그리고 과자를 사서 손에 쥐어줬다. 아이는 무척 좋아했다. 부인은 어쩔 줄 몰라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당혹스러운 일은 이 뿐만 아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옛날 애인이다" "돈을 빌려줬는데 안 갚는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정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땐 모든 게 살갑고 허술한 시절이었으니까.

배삼룡 코미디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