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학교는 오늘도 안녕 못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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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학생의 날’이 친숙한데 달력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고 적혀 있다. 국사 시간에 배웠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 한·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일제는 10일간의 휴교령을 내려 봉합하려 했다. 애국청년들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대학가요제에 출연했던 재호와 승직이를 주말에 만났다. 1997년 전북 지역 예선에서 1등한 ‘하모니’ 팀이다. 곡목이 인상적이었다.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 배상환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학부모가 된 재호는 초등학생 아들이 사물놀이에서 꽹과리를 쳤다며 대견해한다. 걱정이 아니라 자랑을 하니 듣기에 흐뭇하다. “재호는 아직 안녕하구나.”

 학생들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하다. 만약 학생독립운동기념일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제목을 좀 삐딱하게 ‘노예 12년’으로 하고 싶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제목에서 따왔다. 초·중·고 12년이 노예생활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했다. 자율성과 독립심을 길러주는 가정과 교실의 모델을 전 세계에서 수집하고 싶다. 괜한 짓일까.

엄마는 자식의 시간표를 짜주는 걸 모성애로 간주한다. 그것대로 집행하고 빈틈없이 수행한다. 엄마는 24시간 감시자다. 딱해서 묻는다. “왜 아이를 노예로 만드세요?” 엄마의 표정이 절박하다. “아이가 아니라 엄마인 제가 노예랍니다.” 처지를 알긴 아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 말만은 전해야겠다. “집안이 노예소굴이로군요. 엄마도 아이도 모두 노예니까요.”

 어버이날, 스승의 날에는 가슴에 꽃을 달아준다. 학생의 날에는 무엇을 달아줄까. 오늘 하루 마음껏 놀아봐라? 그럴 분위기는 아니다. 어떡하든 대학을 가야 하고, 그것도 이름난 대학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리로 갈 수 없으니 문제다. 적재적소는 사전에나 있는 말이 된 지 오래다. 적성이 아니라 (굳이 글자를 뒤집어) 성적으로 배치하는 관행은 철통같이 유지되고 있다.

 교실은 노예선이 되고 말았다. 이기는 아이만 칭찬하고 즐기는 아이는 야단치는 교실에는 희망이 없다. 배를 흔들자. 1등(championship)보다는 우정(friendship)이라는 제목의 배가 행복한 목적지로 데려다 준다. 20세기 말에 학생들이 옥상에서 소리 지르는(악을 쓰는) 예능 프로가 인기였다(‘기쁜 우리 토요일’의 ‘영파워 가슴을 열어라’). 오늘 하루 시간을 정해 전교생이 옥상에 올라가 크게 소리라도 한번 지르도록 허하는 건 어떨까.

주철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