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정신건강|자기상실증(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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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중견실업가 한 분이 종합진찰을 받기 위해 내과에 입원했다. 허탈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몸에 대한 진찰결과는 정상이었다. 종내는 신경정신과에서도 진찰을 받았지만 역시 특별한 병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문제거리가 있었다. 너무 일에만 몰두하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기상실증이라고나 할까.
그의 하루는 일밖에 없다. 그에게서 일을 빼 놓으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벽 일찍 일어나면 회사에 나가기 전에 외국 지사로부터 일일보고를 받는다. 여덟시 출근하면 국내 업체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9시부터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나면 결재를 한다.
하오에는 국내현장 몇 군데를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외부회의에 참석하거나 손님을 접대한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밤 10시쯤. 그리고 나서는 곧 잠자리에 든다.
그에게는 사생활이란 게 없다.
자기 가족이나 친지와의 다정한 시간도 없고 자기자신을 생각해 보는 시간도 없다. 눈을 떴다하면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일 뿐이다. 그래서 허탈에 빠진 것이다.
최근 우리네는 웃사람·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몹시 일에 쫓긴다.
선진국대열에 들어서려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는 몇 갑절 더 노력해야할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개인의 생활을 가질 여유가 없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일이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데 일에만 쫓기고 자기 인생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대 일 자체가 그 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리고 자기가 어디로 향해 줄달음질 치는 지도 모르고 계속 뛰기만 하는 것이 문제거리인 것이다. 한참 뒤다 보면 내가 뭣 때문에 이렇듯 뛰고 있는지를 몰라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그래서 허탈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은 때때로 바보처럼 멍청하게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어린애처럼 철없이 노닥거리는 순간도 필요하고, 격 없는 친구와 부담 없이 떠드는 시간도 필요하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바쁘게 일하는 사람일수록 일을 떠나서 시간을 보내는 순간들을 가져야 일의 능률도 나고 창의력도 더 왕성해진다.
일에만 시간을 모두 쏟으면 그 일 자체에 차질이 생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일을 쉬지 않고 해서 진급을 빨리 하고 돈도 많이 벌고 기업체도 발전하고-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다음 자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
일 자체가 득적이 될 때 그 일을 해내는 방법마저도 무리가 오고 때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해 나가는 경우도 생긴다. 급기야는 사는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자각이 생길 때 허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진급이 좀 늦어져도, 돈벌이가 욕심껏 되지 않아도, 기업의 성장이 다소 둔하되어도, 먼 뒷날을 위해 느긋하게 견디어 나가는 직장인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인생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자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음은 김승조박사(가톨릭 의대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장)가 집필하는 산부인과 질환이 연재됩니다> 【김광일<한양대병원 신경 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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