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전기·검침원으로 출발...자구의 마력에 빠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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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나는 경성전기의 검침원이었다. 43년 일본 송산간 중을 졸업, 학교장의 추천으로 경파전기에 입사한 꽤 기만만 한 신입사원이었다고 할까. 당시만 해도 경성전기는 엘리트들이 모이는 직장으로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내 꿈은「유능한 회사원으로서의 성장」이었다.
때문에 내 전직을 아는 사람은 가끔 r어쩌다 엉뚱하게 야구꾼(?)으로 둔갑했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으례『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하고 웃어 버리곤 하지만 사실상 이 세상에 야구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꼬』하고 느낄 만큼 야구에 강한 애착을 느끼며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내가 야구와 첫 인연을 맺게된 것은 45년 해방이후 경성전기에 야구부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일본 송산동 중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야구부에 입단. 최초에는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매니저로 야구장 출입을 했다. 그 후 3루 수를 맡았고 가끔 피처가 빠질 때 땜질 피처 노릇도 하면서 야구의 마력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6·25가 터졌을 때 야구복 1벌만을 갖고 한강을 건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54년 6월 휴전 후 의사에 복직했을 때 나를 실망시킨 것은 야구부가 해체되고 만 것. 당시 나의 직책은 서기였는데 사무실에 앉아 주판알을 굴리노라면 운동장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멋지게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나는 백구가 눈앞에 가물거리고…. 때문에 한달 치 일거리를 한 1주일 동안 밤을 세워 해치우고 나머지 시간을 야구장에서 보냈다. 회사의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니 웃 분에게 미안했지만 야구에 대한 집념은 떨쳐버릴 수 없고…. 이렇게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나는 56년 2윌 사표를 내던지고 「야구인으로서의 길」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야구장 터줏대감이 되었고 사위까지 야구선수(이해창)로 맞아들이게 된 것 같다. <풍규명><야구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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