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7)제77화 사각의 혈투60년(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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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7살에 「프로」데뷔>
형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는 당장 안양으로 달려갔다.
당시 나는 현역선수생활에서 은퇴한지 2년째로 프러모터를 하다가 한국프로복싱 사상 첫 트레이너가 되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국내에는 프로복싱의 트레이너란게 없었다.
두 번째 트레이너는 나보다 1년 후 임종태 선수와 콤비가 된 조익성씨(현 한국권투위원회 사무국장)였다.
나를 만난 형님은 「기막힌 놈」에 대한 소문을 들려줬다. 안양천변 다리 밑에서 다른 넝마주이 패거리들과 대관 싸옴을 벌이는데 어린놈이 혼자서 맨주먹으로 10여명을 상대하여 좌충우돌, 일기당천의 돌주먹을 과시하더라는 것이다.
몸놀림이 번개같이 빠르고 거의 맞지를 않으니 오히려 개떼 같이 에워싼 상대 패거리들이 쉴새없이 내뻗는 좌우스트레이트에 추풍낙엽지듯 했었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형님은 그 며칠 후 우연히 이 무서운 아이가 체육관에 놀러와 서성대는 것을 목격, 복싱선수로 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신인을 찾고 있던 나에게 연락해준 것이다.
나는 그 소년을 만났다. 나이에 비해 키는 큰 편이나 호리호리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며 고생스럽게 자란 모습이 역연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엔 물러설 줄 모르는 도전적인 기백이 넘쳐흘렀고 야윈 체구엔 허약함은커녕, 오히려 강인한 힘이 스며 있었다.
나의 제안에 그는 전혀 머뭇거림이 없이 흔쾌히 따라나섰다.
이렇게 하여 서강일은 우리집 식구가 되었다.
나는 마치 폐광에서 금광석을 주운 듯 뜻밖의 횡재(?)에 기뻤고 심혈을 기울여 갈고 닦았다.
당시 나는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생활이 몹시 구차했다. 그렇지만 서강일 만큼은 잘 먹여줘야 했다.
2, 3일에 한번씩 쇠고기를 사다가 서강일에게만 먹였다. 서강일 보다 나이가 어린 자식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잘 이해해줬고 서강일도 융화하려고 노력했다.
집안에서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으나 난생 처음 따뜻한 가정의 분위기가 즐거운 듯 했고.유명한 선수가 되어보겠다는 결의가 굳건했다.
처음 약1년 동안은 혼자서 나돌아다니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싸움과 복싱은 다르므로 한때 서강일은 싸움 같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으나 역시 복싱에도 천재였다.
명동성당 앞에 있던 서울체육관에서 테스트를 받아 합격된 서강일은 61년 대구에서 데뷔전을 가졌다. 17세의 나이에 프로선수가 된 것이다.
그 때는 웰터급이었고 6라운드를 뛰어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금방 복싱계의 주목을 끌었다. 『대단한 신인의 등장』 이라고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시련도 일찍 다가왔다.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국가대표선수였던 이광주와 서울운동장 배구장에서 벌인 8라운드 경기였다.
서강일보다 장신인데다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하는 이광주는 아마추어 경력이 많은 등 어느 모로 보나 한수 위라고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막상 종이 울리고 나니 상황은 달랐다. 17세의 애송이가 월등히 우세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광주의 열세는 확연했다.
불같은 투지와 경쾌한 푸트워크로 쉴새 없이 치고 빠지는 서강일의 속공에 이광주는 쩔쩔 맸고 관중들은 완전히 매료됐다.
그런데 열건 8라운드가 끝나자 어이없게도 이광주의 판정승이었다. 아마 심판들이 국가대표 출신인 이광주의 장래를 감안한 모양이었다.
관중들이 들고 일어섰다. 링에 무수한 돌이 날아들어 난장판이 되었다.
서강일은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렇다고 낙담할 체질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오히려 그의 투쟁심을 불질렀다.
이후는 승승가도. 그에게는 적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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