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대통령과 한겨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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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한민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사건 중 하나가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이다. 군사독재에 저항해 신문사에서 쫓겨났던 해직 언론인들이 주축이 된 한겨레신문은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 옹호 등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 언론사에 한줄기 햇빛과 같았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국민 주식으로 자본을 조달한 한겨레는 민주화의 희망이자 상징이며 촉매였다.

그러나 창간 이후 한겨레는 부족한 자본 때문에 늘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90년대 들어 인터넷이 급속히 확산하면서 신문 구독자 수가 급감했고, 한겨레처럼 시장점유율과 자본력이 약한 진보 신문사들은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부터 한겨레는 직원 수를 대폭 줄였고, 올해에는 제2 창간을 선언하면서 발전기금 모금에 나섰다.

엊그제 시중 신문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한 달 월급을 발전기금으로 내려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노 대통령은 한겨레 창간과 그 이후 두 차례 증자 때도 기금 모금에 참여한 바가 있어, 그동안 애독해 왔던 한겨레를 한 번 더 돕겠다는 순수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악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노 대통령의 지지층이나 청와대 눈치를 보는 공직자와 기업인들에게 '따라하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진보개혁적 성향의 노 대통령이 한겨레와 같은 신문을 심정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문사 간의 생존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의도가 어떻든 대통령이 특정 신문을 지원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론의 중립성이나 공정성 못지않게 대통령의 중립성이나 공정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노무현 정부와 보수 신문 간의 불신이 깊고, 신문법을 제정해 정부가 신문을 규제하고 지원하려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취임 이후 신문에 관한 노 대통령의 처신은 문제가 많았다. 국회의원 시절 노 대통령은 조선일보와 명예훼손 송사를 벌일 정도로 보수 신문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그는 보수신문의 비판적 기사나 논조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노 대통령에게 신문정책이란 없고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처방만 있다는 점이다. 당선자 시절 한겨레신문사 전격 방문, 한겨레신문 정연주 논설위원의 KBS 사장 임명 등을 통해 노 대통령은 신문을 활용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보여줬다.

반면 정부 부처 브리핑제 도입, 가판신문 구독 중단 등 구조적 개혁을 예고하는 듯 보였던 취임 초기 신문 관련 조치들은 흐지부지됐다. 노무현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는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잇따라 제시했지만 수십여 년간 기형적으로 성장한 신문산업을 정상화시키려는 정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올해 초 곡절 끝에 여야 합의로 신문법이 국회를 통과하긴 했지만, 진보 신문을 지원하고 보수 신문을 규제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불식시키지 못했고, 곧바로 위헌 소송 시비에 휘말렸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정부의 방관 하에 진행된 신문시장의 무질서와 제살깎기식 경쟁은 신문 전반에 대한 독자와 광고주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이제는 거의 모든 신문이 정부의 정책적 지원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지경이 됐다. 특히 한겨레처럼 자본 여력이 부족한 진보신문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자본력이 우세한 보수 신문만 살아남고, 공론장으로서 신문의 기능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신문의 위기는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현대사회의 원동력인 민주화와 정보화가 모두 심각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한겨레를 구하는 방법은 한 달치 월급을 발전기금으로 희사하는 것보다 한겨레 같은 건강한 신문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정책적 토대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다. 한겨레가 진정 바라는 일도 그것일 게다.

장호순 순천향대 교수.신문방송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