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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걸에게 한 수 배웠죠 … 2m33㎝ 존슨, 천하장사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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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인 씨름 거인’ 커티스 존슨이 28일 전국체전이 열리고 있는 제주를 찾았다. 그는 매년 휴가를 모아 한국에 온다. 지난해 11월 서산 천하장사대축제에 참가한 존슨(왼쪽)의 경기 장면. [사진 대한씨름협회]

키 2m33cm. 마주 서 보니 위압감마저 들었다. 2층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는 악수를 나누자마자 “여기 윗 공기는 아주 맑은데 그쪽은 어떠냐”며 농담을 던지고는 껄껄 웃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쾌활한 친구”라는 김병헌 대한씨름협회 실무부회장의 설명 그대로였다.

 미국인 커티스 존슨(34)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키 2m33cm에 몸무게 190kg, 신발 사이즈 400mm의 거구다. 그런데 씨름을 한다. 체격 덕분에 ‘역대 최장신 씨름꾼’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씨름인들은 그에 대해 “볼수록 매력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인이면서도 씨름에 대한 애정이 한국인 못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8일 제주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만난 존슨은 “매년 한국에 오는데 올해도 6주 간의 한국 방문을 위해 직장의 연간 휴가에다 무급휴가까지 신청했다. 그렇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존슨이 씨름과 사랑에 빠진 건 2010년부터다.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우연히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됐다. 씨름의 역동성과 다양한 기술에 매료된 존슨은 이후 코치를 선임해 일주일에 2~3차례씩 훈련하며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는 9개월 만에 뉴욕 씨름대회에서 우승했다. 2011년부터는 매년 국내에서 열리는 천하장사대회에도 출전했다. 그저 큰 키로 내리누르거나 힘으로 밀어낼 줄 밖에 몰랐던 2011년과 2012년에는 조기 탈락했지만, 지난해엔 천하장사 64강에 올랐고, 세계특별장사대회 3위에 입상했다.

지난 24일 이봉걸 감독의 병문안을 간 존슨.

 씨름의 매력에 대해 존슨은 “어떤 스포츠보다도 예의 바른(polite) 종목이고 운동의 원리도 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씨름 경기에서는 이긴 선수가 넘어진 선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게 예절로 굳어졌다. 그간 농구·미식축구·야구 등 여러 스포츠를 접했지만 이처럼 패자를 배려하는 종목은 보지 못했다. 인간미가 느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존슨은 농구 선수 출신이다. 뉴욕 세인트존스대에 농구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미국프로농구(NBA)의 하부리그인 아메리카농구협회(ABA) 소속 팀에서 뛰었다. 잠시나마 중국프로농구(CBA)에도 몸담았다. 최근엔 농구 관련 일을 모두 정리하고 뉴욕에서 은행의 투자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존슨은 “요즘엔 은행 일과 씨름 두 가지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매년 한국을 찾고, 천하장사대회에 출전하는 건 씨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서다. 그는 “최근까지 구미시청 백두급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 제대로 된 연습 상대를 구하기 힘든 미국과 달리 한국에 오면 수준급 스파링 파트너가 많아 행복하다”고 말했다. 제주도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는 “최고 수준의 경기를 내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면서 “전국체전에서 다양한 연령·체급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익힌 기술을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동석한 김병헌 부회장은 “존슨이 한국에 자주 드나들며 우리 말에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문어·오징어류를 빼고는 한식도 잘 먹는다. 덩치가 산 만한 흑인이 밥 위에 김치를 올려 맛있게 먹는 모습은 내가 봐도 신기하다”고 했다.

 존슨은 어느덧 국내에서 지명도가 높아졌다. 한국에 올 때마다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최근에는 연예기획사로부터 매니지먼트 계약 제의도 받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 씨름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보답할 기회를 찾고 있다. 지난 24일에는 허리 수술 후 입원 중인 ‘인간 기중기’ 이봉걸(57·2m5cm) 에너라이프 감독을 만나기 위해 대전에 다녀왔다. 존슨은 “이 감독님은 무게중심을 낮추지 못해 고민에 빠져 있던 내게 ‘상대를 들어올려 상대의 중심을 허물면 된다’며 역발상의 해법을 주셨다. 감사의 표시로 TV 출연료를 병원비로 내고 왔다”며 웃었다.

 존슨은 다음 달 10일 경북 김천에서 개막하는 천하장사씨름대회에 참가한다. 주무기인 밀어치기의 완성도가 높아져 자신감에 차 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준희(57) 씨름연맹 경기위원장, 이태현(38) 용인대 교수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씨름 영웅들을 만나 중심 이동과 관련한 노하우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상체를 많이 움직여 상대를 현혹한 뒤 대각선 방향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기술을 집중 연마했다. “ 천하장사대회는 8강, 세계특별장사대회는 우승을 목표로 정해놓았다”고 밝힌 그는 “씨름 대중화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할 준비가 돼 있다 ”고 다짐했다.

제주=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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