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의미 |지친몸과 마음을 감싸줄 풋풋한 생명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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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고향은 사라져 버렸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돌아가 지친 영혼과 육신을 잠시 누일, 그리하여 그 메마른 영혼과 육신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줄 탄생과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고향은 지금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겐 위안으로서의 고향도, 영원한 어머니로서의 고향도 이미 사라지고 없는지 모른다.
이 싸늘한 도시의 거리에는 고향을 잃어버린, 혹은 고향이 없는 회색빛 얼굴들이 쫓기듯 스치며 상담을 하고 거래를 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타향을 건설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이 메마른 일상속에서 고향의 얼굴을 지닌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의나의 삶이 형편없이 지쳐 빠져 있고 또 삭막할대로 삭막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얼굴을 만날 때마다 한 없는 생명감과 기쁨을 느낀다. 그 생명감이란 일체의 인공적·도시적 병폐와는 무관한, 흙을 밟고 흙과 더불어 친화한 사람에게서 느낄수 있는 원초적인 풋풋한 생명감이며, 그 기쁨이란 그런 건강한 삶이 주는 안온한 기쁨이다.
안온한 기쁨이라고 표현했지만 우리의 나날의 삶이 그것으로 가득채워지기를 우리는 얼마나 바라왔던가!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은 우리의 그러한 기도와는 또 달리 얼마나 정반대의 편에 서 있는가!
최근에 나는 시골에 있는 한 젊은 시인으로부터 여러편의 시를 받아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 이런 귀절이 있었다.

<아버지, 논으로 울고 웃고 싸우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적막하게 굽은 등이 오늘따라 왜 이리 넉넉합니까 집에 들면 강건너 지심을 걱정하시는 어머니 곁에 앉아야 맘이 놓이시는 어머니를 가지신 우리들의 아내는 마음을 무엇으로 안심시킬까요 아버지.>
농부인 아버지의 삶을 그린 일견 평범한듯 보이는 이 시에서 그러나 나는 평범하지만은 않은 의미깊은 세계가 담겨 있음을 보았다. 즉 그것은 <아버지 세대>로 대표될 수 있는 전형적인 농부의 세계, 흙과 싸우고 친화하며 커다란 긍정의 세계, 그나름의 질서와 온존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우리의 전형적인 농촌공동체가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속의 화자(화자)인 <나>는 이미 붕괴의 현장에 서서 <안심>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름대로 질서와 화평의 세계를 누릴 수 있었던 고향, 그리하여 우리에게 안온한 기쁨을 주고 뿌듯한 생명감을 주어왔던 고향은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너무 늙고 가녀린 어깨뒤로 황혼처럼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만 고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벽촌인 듯한 우리의 농촌에도 고향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이시는 강렬히 보여준다.
고향은 사라져 버렸는가. 이 무어라 말할수 없는 아우성과 비리와 현란의 회색거리를 지나며 나는 가끔 내가슴 저 밑바닥에 대고 이 물음을 던지곤 한다. 그리고 내곁을 스치며 쫒기듯 지나는 얼굴들에서 그리운 고향의 얼굴들을 찾아본다.
이시영 <약력> 49년 전남 구례출생. 시인. 69년 중앙신춘문예로 데뷔. 76년 시집『만월』내놓음. 현재 창작과 비평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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