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 연출·주연은 정 통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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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월 만에 재개된 장관급 회담의 한복판엔 남측 수석대표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있었다. 회담 일꾼으로 변신한 그의 데뷔전이었다. 워커힐 호텔을 무대로 펼쳐진 이번 회담은 정 장관이 연출과 주연을 함께 맡은 작품에 가깝다는 평가다.

그는 회담 전체를 진두지휘하는 '회담 매니저'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3박4일간의 회담 과정엔 '방송 기자→스타 정치인' 출신 통일부 장관의 장점과 단점이 그대로 배어나왔다.

그는 역시 스타일리스트였다. 회담 첫날인 21일 호텔에 도착하는 북측의 권호웅 단장을 귀엣말로 맞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환담. 권 단장의 손을 잡고 나타난 정 장관은 손을 꽉 잡은 채 엘리베이터까지 50m 이상을 함께 걸었다. 방송.스틸 카메라의 초점이 집중된 이 장면은 방송과 조간신문의 톱을 장식했다.

반북 단체의 기습 시위에 기분이 상했을 북측 대표단의 마음을 정치인 특유의 스킨십으로 움직이려 했다는 것이다. 남북 대표단이 각진 테이블 중간에 선을 긋고 마주앉는 '남북대화'식 회담 풍경에 종지부를 찍은 것도 그였다. 남북 회담 사상 처음으로 원형 테이블이 도입됐고, 정 장관은 북측 단장과 옆자리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눴다. 이는 회담 기간 내내 '회담 문화 개선'을 제1의 모토로 삼은 남측 대표단의 최대 세일즈 포인트가 됐다.

그는 북측 단장을 수백 명의 기자와 카메라가 빽빽이 들어찬 프레스센터로 끌어내 공동 보도문 발표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런 모습들에서 '그림'과 '구도'에 탁월한 정 장관의 진면목이 드러났다는 얘기가 나왔다. 남측 대표단이 공동 보도문 발표 시간을 방송사의 9시 메인 뉴스 이전으로 맞추려고 안간힘을 쓴 것도 방송의 생리를 잘 아는 정 장관의 영향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앵커 출신다운 화려한 언변으로 북측 대표단에 어필했지만 너무 저자세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회담 첫날 정 장관은 '회담 신동'이라며 카운터 파트인 북측 권 단장을 잔뜩 치켜세웠다. "그동안의 어느 대표보다 권 단장의 연설이 훌륭했다"거나 "권 단장의 말씀은 한마디도 버릴 게 없다"로 이어지는 그의 발언들은 회담 수석대표로서 너무 가볍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남측 대표단 전체가 회담의 알맹이보다는 모양새에 더 치중했다는 쓴소리도 나왔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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