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왕국|값싼 에너지의 덫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파이잘」왕의 충격적인 석유금수 조치는 사실 그 목표로 내세웠던 바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이틀후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실시한 휴전은 어차피 실시되도록 됐던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미국 원조의 덕분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군사적으로 강력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공급하던 63만8천 배럴의 석유는 미국이 매일 소비하던 l천7백만 배럴의 4%에 지나지 않는 양으로서 이를 중단하는 것 자체로는 미국의 정책을 돌릴만한 위력을 갖지 못했다.
73년1월 중순이 되자 중간의 석유수출량은 평상시의 60∼70%로 내려갔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유럽과 일본이었다. 중간석유에 75%를 의존하고 있던 이들 국가들은 공급량이 줄어들자 자기들끼리 구매경쟁을 벌여 석유 값이 급등하도록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금수조치가 일으킨 실제타격은 여기서 비롯했다.
한달전 만해도 배럴 당 5달러조차 주지 않겠다고 빼던 소비 국들은 이제 경쟁입찰에서 12달러까지 내겠다고 덤볐다. 그것은 종전가격의 4배에 해당했다. 서구는 자기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놓은 값싼 에너지란 이름의 덫에 스스로 걸려든 셈이다.
모든 선진개발 국의 서민들은「파이잘」왕의 금수조치로 생활이 전보다 더 느리고 더 어둡고 더 추워지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이곳저곳에서 아랍인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하나 감히 큰소리로 비난하진 못했다.
선진국의 정치인들은 갑자기 중동문제에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이런 여파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파이잘」왕은 여러 세기동안 다른 어느 아랍지도자도 누리지 못했던 엄청난 국제정치상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
「키신저」미 국무장관은 이집트 군이 수에즈를 건넌지 한달 만인 73년11월8일「파이잘」왕을 알현하러 리야드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키신저」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22억 달러의 군원을 제공한 것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원래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공산주의와 동일시 해온「파이잘」왕은 그런 설명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는 말했다.
『이스라엘에 오는 유대인중 대부분이 러시아 출신입니다. 그들은 중간에 공산주의의 발판을 구축하려고 해요. 이스라엘이 공산당의 목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세계각처에서 높은 지위에 들어앉아 있어요.』그러면서「파이잘」왕은 유대인이며 미국외교의 정상에 앉아있는「키신저」를 똑바로 쳐다봤다.
「키신저」는 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폐하, 문제는 현 사태를 영구평화로 발전시키는 일입니다.』이에 대한 왕의 답변은『이스라엘을 철수시키라』는 단 한마디였다.
「키신저」의 방문은 미국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해제하지 못한 채 끝났다.
74년2월 미국은 그때까지 아랍국가에 금지했던 현대무기를 대량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하겠다는 언약을 했다. 동시에「키신저」는 대규모 기술협조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금수조치를 서서히 완화하기 시작했다.
「파이잘」왕은 금수조치의 원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전 세계로 하여금『세계경제를 위해서는 아랍세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석유가격의 인상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이슬람교의 부흥무드가 고조되었다. 석유라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부와 신이라는 정신적 존재를 연결시키는 문제를「파이잘」왕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석유를 주신 분이 누군 줄 아오. 그분이 바로 알라신이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