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과 「스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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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세기 들어 중국대륙의 속사정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인의 중국관을 형성하는데 「에드거·스노」만큼 넓고 깊게 기여한 사람은 동서양 어느 쪽을 찾아보아도 없을 것이다.
「스노」는 중공혁명의 으뜸가는 기록자였을 뿐 아니라 워싱턴과 북경이 서로 등을 돌리고있던 전후 30년 동안 중공지도자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은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스노」는 공산주의자도 그 옹호자도 아니었다.
미주리대 신문학과를 졸업한 「스노」는 월스트리트에서 증권투자로 번 약간의 돈을 자금으로 1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안온한 삶의 꿈은 중국 대륙과의 만남과 동시에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그가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것은 1928년, 잠깐 동안의 방문을 위해서였다. 이 잠깐은 한해, 두 해로 늘어나고 「스노」는 결국 13년간을 이 땅에 머무르게 됐다.
풋나기 이방인이었던 「스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모두 놀라운 상황들뿐이었다. 중국국민들은 후진성과 무지, 가난과 굶주림 속에 허우적대고, 썩고 무능한 정부에 얽매여 있었다.
충격을 받은 「스노」는 중국에 남아있기로 작정했다. 무슨 커다란 목표나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처럼 중국에서는 그는 『역사의 커다란 물결 속에 던져진 한 톨의 날알』에 불과했다.
1936년 상해에서 기자 일을 하던 그는 손문의 부인 송경령 여사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중국대륙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중공지도자들을 만났다. 국민당 정부가 붉은 비적들이라고 비난하여 현상금까지 건 사람들이었다.
연안 등지의 황량한 동굴과 움집들에서 「스노」는 역사적인 대장정을 막 끝낸 남녀노소의 게릴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스노」는 이 여행에서 세계적인 「특종」을 얻었을 뿐아니라 모택동·주은내·등소평·황화 등 중공지도자들과 평생의 교분을 맺게됐다.
「스노」가 처음 본 모택동의 인상은 비쩍 마른 「링컨」을 연상케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등은 구부정했고 눈은 크고 형형 했으며 오똑선 코에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 나왔다.
그는 전형적인 중국 농부의 소박한 멋을 풍겼으며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당시 「스노」가 묵고있던 새로 지은 토담집은 모가 살고 있었던 동굴에서 가까웠다. 그들은 모의 동굴에서 매일 만났는데 모는 그의 미국인 손님에게 그가 걸어온 길과 조국을 해방시키기 의한 투쟁내용을 들려주었다.
모와 「스노」는 처음부터 의기가 투합 됐다.
둘은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우정을 쌓아 나갔다.
모와 「스노」의 우정이 미국과 중공간의 관계개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꽃피워진 곳도 연안이었다.
1971년 「스노」가 마지막으로 모택동을 만났을 때 모는 「스노」에게 그가 「닉슨」대통령의 중공방문 후 『관광객으로든 또는 대통령의 자격으로든』 환영할 것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1년 뒤 「스노」가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주일에 한때 「공산주의 타도」에 앞장섰던 「닉슨」대통령은 역사적인 중공방문 길에 올랐다. 『이것은 두 사람의 경력을 고려할 때 거의 믿을 수 없는 아이러니』라고 「스노」의 부인은 말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노」부부는 「매카티」상원의원과 「닉슨」이 앞장섰던 l950년 전반의 「공산주의 히스테리」의 희생자였었다.
중공의 한 고위관리는 『「스노」는 미국의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는 미국이 중공과의 친교를 통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권했다』고 내게 말했다.
최근 중공당국이 북경에서 「스노」사망 10주기 기념식을 큼직하게 연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나 자신도 이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스노」에게 새삼 깊은 경의를 보낸다.
피터·현(재미작가·언론인)
▲1929년=함남 함흥 출생 ▲52년=미 콜럼비아대 졸업 ▲저서=『새벽의 소리』(영역 한국시집) 『북한기행』 『중공기행』(중앙일보 연재) 『황색인형』(소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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