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100년 만의 사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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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마크 프라이어 상원의원(右)이 백인의 린치로부터 살아남은 제임스 캐머런과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 AP=연합]

미국 상원은 13일 아주 특이한 사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근대사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저지른 수많은 '린치(lynch.사적인 처벌)' 행위에 대해 상원이 이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결의안이다.

통상적으로 사죄는 어떤 일을 저지른 데 대해 용서를 구하는 행위다. 하지만 미 상원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사죄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전체 100명의 상원의원 중 80명이 결의안의 발의자로 서명했다.

매리 랜드로(민주당.루이지애나) 상원의원은 결의안 채택에 앞서 "우리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 역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1882년부터 1968년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것만 4743명의 유색인종이 백인들에 의해 살해됐다. 피해자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1892년에는 한 해에 230건의 린치가 자행됐다. 희생자 중엔 범죄 용의자도 있었지만 백인 남자에게 말대꾸를 했다거나 백인 여성을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했다.

희생자들은 사살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눈알이 도려내지고, 집게로 이가 뽑히고, 구타당하거나 말뚝에 묶여 화형되고, 사지가 절단되거나 거세당하는 등의 잔혹 행위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자는 99% 처벌받지 않았다.

린치는 축제처럼 어린이들도 구경하고, 장사꾼은 음료수를 팔고, 사형장행 열차가 특별 편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행위를 금지하자는 법안이 미 상원에 상정된 게 200번이나 된다.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의회에 청원했던 대통령도 7명이나 된다. 하지만 당시까지 노예제의 전통이 강했던 보수적인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이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하는 바람에 법안은 번번이 무산됐다. 미 상원이 100년도 더 지난 사죄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한 배경이다.

이날 상원 본회의장 방청석엔 91세의 제임스 캐머런이 휠체어에 앉아 결의안 통과를 지켜봤다. 그는 75년 전 16세 때 인디애나주에서 백인들의 린치로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당사자다. 그는 그때의 올가미 한 자락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윌리엄 코언 전 국방장관의 부인으로 남편과 달리 흑인인 재닛 코언은 "나는 17세에 백인들의 린치로 살해된 내 사촌 지미를 대신해 여기 증언하러 나왔다"고 말했다. 린치로 살해된 흑인의 후손과 친인척 200명이 이날 방청석에서 '미국식 과거사 청산'을 지켜봤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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