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위안부'가 있을 수 있다니…"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하는 안소니 길모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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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소니 길모어

"남들 눈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할머니들도 종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분들이 원하는 건 제대로 된 사과뿐입니다."

종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중인 안소니 길모어(27)의 말이다.

3년 전 그는 미국에서 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일단 한국에 가서 돈과 시간을 벌어볼까" 하던 젊은이였다. 지금은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이다. 졸업 후에는 미국에 돌아가 한국학 박사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대학원 수업 중에 위안부에 대해 난생 처음 들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충격받았습니다."

사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대학 졸업 후 김해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친구가 '일단 한국에 와 영어강사를 해보라'는 권했어요."

친구를 따라 김해에 온 건 2002년 가을. 5개월간 영어를 가르쳤다. 김해를 떠날 무렵 생각이 달라졌다.

"한국은 매우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지리적으로는 작은 나라인데 신기하게 큰 나라같이 느껴져요. 다양성, 발전, 긴 역사, 전통과 현대의 조화.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뉴욕에서 뮤지컬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대학원 한국학과 진학을 준비했다. 반 년 뒤인 2003년 가을에 고려대 국제대학원 학생으로 돌아왔다. 그 학기 수업시간에 위안부에 대해 처음 들으면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마음이 생겼다. 학교측에서 비용의 절반을 지원키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찾아간 것은 지난해 봄. 이후 그는 나눔의 집을 서너달간 들락거렸다. 한국말을 거의 못하지만 '위안부', '나눔의 집'은 정확히 발음한다. 할머니 너댓분과 인터뷰했다. 말이 안 통해 한국인 대학원생의 도움을 받았다.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쳐 번 돈으로 변영주 감독의 위안부 연작 세 편은 물론 필리핀, 태국, 중국 등 아시아 다른 나라의 위안부 관련 영화도 사 모았다. 15편 정도다.

영화제작을 위해 일본도 찾았다. 여기서는 2차대전 당시 위안소를 이용했던 일본인 퇴역 군인들을 수소문해 만났다. 일본 연구자들의 도움이 컸다. 영화에는 그들의 미안해하는 마음도 담겼다. 일본인 교수.시민운동가.정치인 인터뷰도 들어간다.

최근의 독도분쟁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한국에 살면서 독도를 모를 수는 없다"며 "당시 영어수업 중 중고생들과 얘기해봐도 문제의 본질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렇게 분노할 수 있나 싶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독도는 곧 한국인의 자존심'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단다.

요즘 그는 석사논문을 준비하랴,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하랴, 영화 편집하랴 바쁘다. 논문 주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간 서로 다른 시각의 정치적 측면. 영화와 논문을 위해 관련 자료도 모아 분석했지만 여전히 처음의 충격은 가시지 않는다. 지금 일본의 태도도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역시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그는 하루에 6시간씩은 영화 편집에 할애하고 있다. 80시간 분량의 촬영분, 20시간 가량의 자료사진을 어떻게 압축하느냐가 관건이다. 자료사진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한국의 MBC방송, 그리고 일본 것이다.

영화는 9월에 완성된다. 처녀작이다. 교육 영화로 여러 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이다. 관객은 종군 위안부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함께 영화를 편집하고 있는 대학 동창 라이언 실(23)은 "분명 충격적인 주제이지만 돌아서면 잊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관객의 공감을 얻을 것인지 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언은 지난해 봄 안소니의 요청으로 한국에 왔다.

안소니는 한국학 교수가 되는 게 꿈이며 아시아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도 계속해나갈 계획이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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