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을 것 없다” 당찬 샷 … 큰 바위 같은 LPGA가 흔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우리투자증권

8월엔 박인비를 꺾더니 지난 4일엔 세계 1위 스테이시 루이스(미국)까지 제쳤다. ‘강자 킬러’ ‘수퍼 루키’ 이미림(24·우리투자증권) 얘기다. 이미림은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뛰는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퀄리파잉 스쿨에 응시했다.

 “국내 시장도 좋아졌는데 한국에서나 잘하지 뭣 하러 미국까지 가느냐는 분들이 많았어요. 아빠도 미국은 왔다 갔다 하는 데도 오래 걸리니 일본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죠. 하지만 어렸을 때 박세리 언니를 보면서 나도 꼭 제일 큰 무대, 미국에 가겠다고 다짐했어요.”

  지난 13일 경기도 용인 태광컨트리클럽에서 만난 이미림은 당찬 목소리였지만 어린 나이답지 않게 신중했다. 왼쪽 손목에 피로 골절을 앓는 상태였지만 이날 우리투자증권 VIP고객 40명을 대상으로 한 일일 코치 행사가 끝난 뒤 “힘 닿는 데까지 뭐든지 열심히 해야죠”라고 말했다.

지난 5일 레인우드 클래식 17번 홀 해저드 옆 바위 위에서 샷을 준비하는 이미림. 1998년 박세리의 맨발샷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J골프]

  -이달 초 중국 베이징 레인우드 클래식에서 세계 1위 스테이시 루이스를 꺾고 2승을 올렸다. 바위 위에서 날린 샷이 화제였다.
 “그땐 어떻게 해서든 공을 그린에 올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 뒤에도 또 해저드가 있었거든요. 해저드 뒤에 또 해저드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린에 올리고 최대한 연장전을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린에 올리기 전엔 솔직히 제가 파 세이브를 할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낮았거든요. 핀을 보고 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10야드 이상 오른쪽을 보고 치는 상황이었어요.”

  -18번 홀에선 벙커샷에 이은 버디로 우승했다.
 “그 코스를 제가 많이 돌았던 게 아니라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몰랐어요. 한 타 차 선두였고 오른쪽에 해저드가 있다는 건 알았어요. 그런데 깊게 들어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중앙을 보고 세컨 샷을 했는데 이게 조금 잘못 맞아서 벙커 쪽으로 가게 됐어요. 벙커에 들어가도 살릴 자신이 있어서 크게 걱정은 안 했고요. 마지막 버디 퍼팅을 하는데 감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올해 8월 마이어 클래식에서 박인비와 명승부를 펼쳤다. 당시 첫 승 소감은.
 “인비 언니랑 그때 처음 친 거였거든요. 저는 솔직히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루키이고 언니는 세계 랭킹 2위잖아요. LPGA 첫해여서 빨리 적응하는 게 목표였지 언니를 꺾어보자는 생각은 없었어요. 내 플레이만 잘하자고 생각했죠. 만약에 내가 우승권에 들어가면 최대한 쫓아간다 정도?”

  -골프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
  “아빠가 광주광역시에서 골프연습장을 운영하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취미 삼아 쳐보라고 하셨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전국 대회에 나갔는데 제가 너무 못 치는 거예요. 아빠나 저나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열심히 했어요.”

  -LPGA 가자마자 컷 탈락하며 고전했다.
  “고생 엄청 많이 했죠. 일단 처음에 간 곳이 바하마였는데 거기가 너무 예쁜 거예요. 내가 이런 데서 골프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좋아서 약간 들떠 있었어요. 또 시합을 계속 하다 보니까 이동거리도 만만치 않고 한국의 친구들이 그립기도 하고. 제가 ‘멘털 선생님(정신적 코치)’이 있거든요.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래도 네가 성공하려고 미국까지 갔는데 이렇게 안 좋게 들어오는 것보다는 성공해서 들어오는 게 좋지 않겠니’ 하시는 거예요. 순간 머리에 뭘 맞은 느낌이었어요. 저는 사실 한국에 들어올 생각을 하고 전화를 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아, 이건 아닌 것 같다.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 시합에서 우승했어요. 멘털 선생님이 엄청 큰 역할을 하신 거죠.”

  -특이하게 언니가 매니저로 일한다.
  “일단 아빠는 ‘네가 미국에 간다면 아빠는 안 간다’고 선언하셨어요. 미국이 너무 멀어서 비행기 타기도 힘드시대요. 그래서 일본으로 가길 원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워낙 미국 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서 언니랑 가게 됐죠. 아빠도 저 혼자 보내기는 좀 그렇고, 언니가 저보다 9살 위니까 믿으셨겠죠. 엄마는 제게 용기 주는 역할을 하세요. 제가 힘들 때 엄마 생각하면서 많이 참으면서 했어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들었다.
  “3주 전에 메트라이프 시합 때문에 한국에 왔었는데 두 번째 날인가 엄마한테 ‘아빠가 왜 음식을 제대로 안 드시냐’고 했더니 아빠가 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앞이 캄캄했어요. ‘왜 우리 아빠가 암이지?’ 아빠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걱정되죠.”
 (이미림은 14일에도 슬픈 소식을 접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할머니가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이미림은 아버지에게 15일 열린 LPGA 하나·외환 챔피언십 출전을 취소하고 광주의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골프만 열심히 쳐라”라고 하며 못 오게 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둔 딸의 경기력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아버지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그냥 저를 생각해서 열심히 할 거예요. 내 직업이고 내가 즐기고 있는 거니까. 가족들 때문에 하기도 하지만 저 자신 때문인 게 더 커요.”

  -남자친구는 있나.
  “어휴, 만들고 싶은데 없어요. 골프만 치다 보니까 없는 것 같아요. 주변에 다들 여자뿐이고.”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군가.
  “첼라 초이(최운정)랑 제일 친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10년지기죠. 제가 항상 먼저 미국 가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가 먼저 갔어요. 진짜 ‘베프(베스트 프렌드)’예요. 어려운 것 서로 얘기하고 많이 도와주고.”

  -우연히도 농협의 우리투자증권 인수가 결정된 뒤 농협 로고를 달고 2승을 거뒀다.
  “농협 측에서도 좋아하시더라고요. 행운의 부적 같기도 하고, 로고가 저한테 잘 맞아요.”

  -올해 신인왕 되는 게 목표겠다.
  “리디아 고(현재 신인왕 포인트 1위)랑 점수 차가 많이 나요. 다들 리디아가 할 거다 생각하는데 최대한 쫓아가 봐야죠. 그런데 신인왕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목표는 신인왕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계획은.
  “지금 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 2학년 휴학한 상태예요. 골프선수라고 봐주지 않고 수업을 다 듣지 않으면 학점을 안 줘요. 공부는 나이 들어서 해도 되고 제겐 골프가 우선이니까 휴학했어요. 한국에 있을 땐 골프를 어느 정도 치다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국 가고 나서 오래오래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소한 (박)세리 언니 나이까지는 쳐야 하지 않을까요. 골프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재미있어요. 항상 하던 대로 생각하고 흘러가는 대로 플레이하면서 그렇게 오래오래 골프를 치고 싶어요.”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