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다리 네 개 그리는 아이들 동물원에는 동물이 없고 채소가게엔 채소가 없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아시아라는 말에는 아시아가 없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동물원엔 동물이 없다”는 말로 화두를 꺼낸다. 또 선문답인가.

“북극에만 사는 백곰과 남극에만 사는 펭귄이 한 장소에서 사는 곳이 동물원 아닌가. 진짜 생태계에는 그런 동물은 존재하지 않지. 백화점도 마찬가지야. 식품 매장에 가면 과일과 야채가 같은 코너에 있잖아. 생산지와는 상관없이 바나나와 복숭아가 어깨 동무를 하고 있어. 그런데 동물원과 백화점이 생긴 것은 모두 같은 시기였어요. 도시화 산업화와 함께 그런 탈(脫) 자연의 비현실 공간들이 등장하게 된 거라고. 서구 근대의 지적 시스템이 만들어 낸 산물이지.”

때묻은 생각을 씻어내는 말의 샤워가 계속된다.

“농산물 파는 슈퍼에 가봐요. 거기 자연이 있나. 오이는 비뚤어진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런데 요즘 반듯한 오이가 아니면 상품가치를 잃어. 특히 미국이나 일본이 심해. 규격이 똑 같아야 값도 똑같이 매길 수 있기 때문이지. 그게 어디 농산물인가, 공산품이지. 생물은 원래 불규칙한 것인데, 그래서 자연은 직선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슈퍼에서는 반대지.”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일정한 규격에서 벗어난 농산물들은 폐기처분 한단다. 굶주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영화 ‘파이 이야기’ 봤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바나나가 물에 뜬다는 말을 아무도 안 믿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목욕탕에 바나나 송이를 넣어봐. 정말 뜨거든. 그런데 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피가 흐르는 현실이 아니라 고정 관념을 믿으니 그래요. 정 부장은 쇠고기를 어디에서 사나. 정육점이야, 슈퍼야?”

말꼬리를 흐렸더니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정육점에 통째로 매달린 쇠고기를 사세요. 그래야 자기가 먹는 쇠고기의 모양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지. 슈퍼에 진열된 고기들은 무슨 고기던 똑같이 썰어서 비닐 포장되고 바코드가 찍혀 있어요. 그래서 요즘엔 다리가 네 개 달린 닭을 그리는 아이들이 많다는 거야.”(웃음)

설마 싶다가도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물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날로그 결핍증에 걸리게 되겠지.”

비타민 결핍증이면 몰라도 아날로그 결핍증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 과연 여기는 지(知)의 최전선이다. 당연시되던 일상의 모든 것들이 허공에 붕 떠서 신기루처럼 보인다.

“초등생이 커터 나이프로 친구의 목을 벤 사건이 생겼어. 일본에서 말야. 찔린 아이가 피 흘리며 죽었는데도 보호소에 감호된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아이 만나면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거야.” 남을 찌르고서도 그가 아파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이상감각은 아날로그의 현실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를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다니. 기자 근성으로 되물었다. “전쟁터에서 칼로 적을 죽인 사람과 화살을 쏘아 죽인 사람은 느낌이 다르거든. 미사일로 보이지 않는 도시를 공격할 때 군인의 마음과도 비교해 보세요.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캐나다에서 대학 강의실에 들어와 여학생들을 모아놓고 쏘아 죽였던 범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고. 총으로 죽였을 땐 태연하던 범인이 저항하는 여학생을 칼로 찔렀을 때는 당황해 하면서 자기도 자살해 버리거든. ‘이것이 살인이구나’라는 아날로그 감각이 되살아난 거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2000년 넘게 쌓아 온 형이상학은 피가 흐르는 정육점 살덩어리의 아날로그 감각을 빼앗아갔다. 그들과 싸우다 보면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던 말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다 미쳐버린 니체처럼 될지도 모른다.

“정 부장. 니체가 되어도 좋다면 종군기자 한번 해볼래요? 지금 지식인들은 붕대로 머리를 싸매고 후방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데, 그걸 사람들은 연구실이라고 부르고.” 농을 하듯 웃으며 말하는 이 교수의 얼굴에는 일말의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글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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