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맞고 오는 편이 속 편한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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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꽁꽁 언 땅 위에 또 바람마저 이렇게도 차가운데 태영이는 오늘도 밖에 나가 놀고 있나보다.
올해 네 살 먹은 아들아이 태영이는 한시도 방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집에서 울퉁불퉁 좌충우돌 하는 걸 보면 어디에 나가서도 결코 다른 집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들어오진 않을 성싶은데도 자주 싸움을 하고는 매를 맞고 온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싸워 울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이 상해서 안달을 하며『왜 맞고우니? 너는 손이 없니? 남이 때릴 때 넌 손 가만뒀다 뭐 할래. 다음부턴 가만히 있지 말고 이렇게 너도 대항을 해』하면서 권투하는 폼을 흉내내서 가르쳐 주곤 했다. 하지만 엄마인 내가 안타까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의 가르침은 아무 소용이 없이 그 후에도 걸핏하면 태영이는 소리소리 지르며 울고 들어오는 것을…. 그런데 바로 엊그제 희한한 일이 생겼다. 태영이가 요란스레 바람을 일으키며 집안으로 뛰어들어오면서 신나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말인즉 『엄마, 내가 근이에게 이겼다. 내가 막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울면서 도망쳐 버렸어』 태영이는 발길로 차고 양손은 주먹을 쥐고 권투하는 모양을 해보이며 마치 큰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나는 내심으로 매일 맞고만 들어오더니 너도 이길 때가 있구나 하는 기특한 생각에 『잘했다』고 추켜주며 양쪽 바지가랑이와 손 소매에 묻은 흙을 털어 주고 있는데 밖에서 어린애 울음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옆동네에 사는 근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 집이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근이의 손목을 낚아채 듯 끌고 그애 할머니가 세차게 대문을 밀치며 들어오신다. 잔뜩 화가 나신 얼굴에 격앙된 목소리로 근이의 콧잔등을 가리키신다.『아이 저를 어쩌나!』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근이의 콧잔등엔 태영이가 할퀴어 놓은 손톱자국인 듯한 상처에서 빨간 피가 솟아 있었다. 할머니의 험악한 기세에 겁이 난 듯 옆에 있던 태영이는 소리를 내고 울음보를 터뜨린다.
우는 태영이는 제쳐놓고 근이를 달래고 할머니께 잘못됐음을 몇번이나 반복하여 사과하니 마지못해 마음을 돌리고 돌아가셨다.『뭐 자기집 자식만 귀중한가』 -속으론 그렇게 뇌까리면서도 근이의 얼굴에 생긴 손톱자국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마음에 걸린다.
『그래, 네가 다른 아이를 이기고 돌아왔을 때는 지게 된 아이가 울고 있다는 걸 엄마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구나. 차라리 맞고 오는 것이 훨씬 더 마음 편했던 것을….』나는 몇 번이고 아직까지 속없이 자식한테 이기라고만 부추기던 내 태도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쉴새없이 흐르는 태영이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그가 울고 올 때마다 이겨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내 자신을 뒤돌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요즈음 젊은 엄마들의 자녀교육이 대부분 이런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후좌우 사정 가리지 않고 남을 밀쳐내고 이겨야 산다는 생각을 부부 스스로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식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이기적인 공격심만이 가슴속에 가득한 아이들이 자라서 이룰 사회에 대한 공포가 나를 엄습한다. 『차라리 맞고 오는 것이 낫지…』라고 생각하는 양보심 있는 엄마들이 더욱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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