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겉과 속이 다른 곳|PLO를 키우며 견제하는 아랍 국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스라엘 쪽에서 요르단을 향해 가는 택시를 타고 요르단강을 건너면서 기자는 조마조마했다.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국명조차 기피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요르단이 그「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오는 외국인을 입국시켜 줄지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강을 건너 요르단 측 출입국관리 앞에 섰을 때 그런 불안감은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관리는『요르단강 서안에서 오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그는 백지에 아랍어로 한참 적더니 거기에 도장을 찍어 주며『요르단강 서안은 우리 땅이니까 입국수속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자는 중동순방 길에 이스라엘을 거쳐 요르단으로 들어간 흔적이 전혀 없고, 요르단에는 입국 없는 출국도장만 찍히게 되었다.
모순을 현실적으로 우회하는 인간의 예지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취재를 시작하면서 현지의 한 한국외교관이 일러준 충고는『중동에서는 겉과 속이 다르니까 속단은 금물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충고는 팔레스타인의 국가창설을 범 아랍 적 대의명분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분열, 약화시키려는 일부 아랍 국의 애매한 행동을 비롯해서 중동문제에 얽힌 여러 가지 모순을 이해하는데 열쇠가 되었다.
대의명분과 현실의 차이는 모든 국가관계에 으레 개재되기 마련이긴 하지만 중동의 경우는 그 차이가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때로 세계경제까지 위협할 잠재성을 안고 있다는 데서 더 비극적이다.
기자는 요르단강 서안의 이스라엘 점령지를 두 번 방문했다. 한번은 아랍인안내로 팔레스타인 측 눈을 빌었고, 두 번 째는 이스라엘관리의 안내로 이스라엘 측 눈을 빌었다. 같은 땅이 보는 눈에 따라 정반대로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직접 체험한 셈이다.
「호라위츠」라는 이스라엘 공보 성 관리는 팔레스타인인의「원시성」과「무기역성」등 부정적인 특성을 애써 강조하려 했다.
한 팔레스타인 마을에 들어갔을 때 개가 한 마리 다가오더니 짖기 시작했다.「호라위츠」는 그 개를 노려보면서『아랍 개는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면 짖다가도 도망간다』고 말했다. 과연 그 개는 꼬리를 감추며 슬슬 도망갔다.
이 일화를 후에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들려주었더니 의외로 그들은 껄껄 웃으면서『사실이 그렇다』고 했다. 유대인을 헐뜯는 아랍 쪽 농담은 없느냐니까『유대인들은 하도 지독하니까 자기들 선지자까지도 돈을 받고 십자가로 보냈다』는 정도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과격파들이 만들어 낸 가장 지독한 농담으로 이런 게 있다.
어느 날 하느님은 종교창시자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가졌다. 예수가 오고, 공자가 오고, 부처도 왔다. 한참후 예수가 하느님에게 물었다. 『마호메트는 안 부르셨습니까?』 하느님은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아 깜박 잊어버릴 뻔했군. 애, 마호메트야, 코피 4잔만 가져오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민족의 무능을 드러내려는 이런 농담들은 사실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원주민의 생존권을 침해하고 있는 자기들로서는 불가피한 행위를 스스로에게 정당화시키는 뚜렷한 심리적 자위기능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중동분쟁의 씨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일대는『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란 성경 구절이 주는 인상과는 반대로 박토중의 박토다.
이 지역은 연간 강우량이 4백m정도.
그래서 유일한 수원인 요르단강의 물이 영토만큼이나 쟁탈의 대상이 되어 왔다.
주변국가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물을 끌어다 쓰니 요르단강물은 형편없이 줄어들어 지금은 청계천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박토에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창시되고 이슬람교는 메카와 메디나 다음으로 이곳을 제3의 성지로 삼고 있는 것은 종교란 원래 고난 속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란 가설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베이루트공항을 내려다보는 동쪽야산 위에는「진보사회당」지부 사무실이 있는 조그만 2층 건물이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암살 당한「줌블라트」당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옆에서 16세난 소년이 기관단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기가 더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소년은 건물 안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20평정도의 사무실 한구석에 놓여 있는 포장을 걷으니까 거기에는 러시아 제B-10무반 동 총 2문과 6발의 포탄이 놓여 있었다.
그 건물에서 약 1백m쯤 더 올라가니 산 위에 2문의 57mm야포가 은폐도 되지 않은 채 공방 쪽을 겨누고 있었다.
자칭 사수라는 청년에게 밀집한 건물사이로 포를 쏠 경우 착탄 관측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쌍안경으로 한다고 했다.
베이루트시내 곳곳에서 파괴된 건물을 목격한 기자에게는 그 사수의 자신 있는 대답이 별 신빙성이 없게 들렸다.
6년 동안 내란이 계속되는 동안 레바논의 정치는 대화 대신 총탄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증거가 이 정당지부의 사무실주위에 설치된 야 포들이다.
기자가 베이루트를 떠나던 날에도 한국대사관(김영섭 대사)에서 1백m 떨어진 이라크 대사관에 폭탄이 투척돼 1백여 명이 사상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우리대사관의 이선진 서기관은 대낮에 차를 타고 가다가 권총을 겨누는 괴한에게 차를 강탈당했다.
중동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기능공들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베이루트의 경우가 가장 심한 듯하다.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