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싱글 대디…혼자면 어때 난 행복한 아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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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반죽은 우유를 적당히 섞고 나서 손에 힘을 주고 이렇게…."

"에이, 내가 할거야. 아빠보다 내가 더 잘하잖아."

화사한 햇빛이 쏟아지는 한가로운 일요일, 주방에서 부녀의 움직임이 부산합니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요리를 하는 아빠, 그런 아빠를 따라해 보겠다며 나서는 딸의 몸짓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느 가정과는 달라 보입니다. 엄마가 보이지 않네요. 그런데도 둘은 마냥 행복해 보입니다.

케이블방송 푸드채널의 권홍진(37)PD. 그는 이른바 '싱글 대디(single daddy)'입니다. 1999년 이혼 후 혼자서 딸 채원(가명.8)이를 키워 왔습니다. "애가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넌 내 딸이야, 마누라가 아니라고"라며 눈을 부릅뜨는 권씨나 "아빠는 담배를 끊어야 해요. 냄새 나서 이젠 뽀뽀도 안 할 거야"라며 눈을 흘기는 채원이. 이번 주 week&은 두 사람의 일상을 살짝 들춰보겠습니다. 홀아비의 궁상이 묻어날까요, 아니면 알콩달콩 동화 같은 얘기가 들릴까요?

아빠의 일기1

나의 하루는 채원이가 써놓은 '교환 일기'를 보면서 시작된다. "일찍 들어오세요. 참, 나 크레파스 다 썼어요. 2000원만 주세요. 아빠 싸랑해요!" 가끔 맞춤법도 틀리고 어법도 안 맞는다. 그래도 이만큼 쓰는 걸 보면 대견하다.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가 처음 쓴 편지에 채원이가 답장을 보내면서 시작된 우리의 교환일기는 서로의 감정과 일상을 알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됐다. 난 주로 '숙제 빨리 해라, TV 늦게까지 보지 마라'는 내용인데 반해 채원이는 '친구와 다퉜다, 누가 좋다'는 등을 적는다. 물론 용돈 달라는 얘기가 가장 많지만.

이젠 다 컸다고 나랑 같이 목욕하기도 싫단다. 함께 자기도 힘들어졌다. '웃찾사'라도 늦게까지 함께 보면서 간지럼 태우고, 간식거리라도 좀 먹여야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다. 나 아니면 어디도 안 간다고 졸졸 따라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혼하던 해 겨울, 만 두 살밖에 안 됐지만 채원이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보살펴 줘도 온종일 울기만 했다. 할 수 없이 당시 내가 일하던 방송국으로 애를 데리고 와야 했다. 방송국 사람들은 남 속도 모르고 아장아장 걷는 꼬마 숙녀가 귀엽다며 난리를 쳤다. 특히 여성 작가들은 한 번이라도 안아 보려고 줄을 섰다.

"근데, 예쁜 딸을 두고 엄마는 어디 갔어요?" "나, 이혼했어. 앞으로 혼자 채원이 키워야 하니깐 당신들이 좀 도와줘야겠어."

'이혼이 무슨 자랑이라고 저렇게 떠들고 다닌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나로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애 뒤치다꺼리를 위해선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했다. 덕분에 난 바쁜 방송국 밥을 먹으면서도 채원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보장받았다. 주말은 나 스스로 '채원이 데이'라 명명, 휴대전화를 꺼 놓은 채 회사일을 완전히 접는 '간 큰'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계속 그래도 애 보는 아줌마로는 한계가 있었다. 할 수 없이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머니는 주말마다 채원이와 함께 연극이며 뮤지컬을 보러 분주히 다니셨다. 채원이는 지난해 전국 발레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모두 어머니의 보살핌 덕분이다. 문제는 어머니가 중국에 있는 누나집에 가기 위해 1년에 한두 달 한국을 비울 때다. 그럴 때면 난 채원이 상 차려주느라 정신이 쏙 빠진다. 아침 식사로 하루는 김치찌개, 다른 날은 토스트, 또 하루는…. 이것 저것 다른 걸 준비한다고 애를 쓰건만 이 꼬마 숙녀는 툭 하면 반찬 투정이다. "아빠가 차려주는 거 먹느니 내가 굶지."

지난해 어느날 난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시무룩해 있는 모습이 어린 딸에게도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5000원짜리 한 장, 1000원짜리 두 장, 100원짜리 동전 4개가 놓여 있었다. "아빠, 돈 내가 줄 테니 힘내세요. 내가 커서 더 많이 벌어올게"라는 편지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백화점에 채원이와 손잡고 갈 때면 점원들이 "아빠랑 같이 다녀 좋겠네. 엄만 어디 있어"라며 묻곤 한다. 그럴 땐 나도 채원이도 할 말이 없어진다. 애 엄마가 한번 다녀간 적 없고, 내가 얘기도 안 꺼냈지만 채원이는 자기가 어릴 적 아빠 엄마가 헤어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는 듯싶다. 내게 한 번도 엄마 얘기를 묻지 않았다. 대신 올해 들어선 부쩍 이런 얘기를 자주 한다. "아빠랑 노는 거 재미없어. 새엄마 빨리 구해와."

난 어린 시절부터 어려움이란 걸 모르고 자랐다. '오렌지족'의 원조쯤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최근 대학 동창들을 만나면 부쩍 이런 얘기를 듣는다. "홍진이 너,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 "자식아, 너도 혼자 애 키워봐. 철들지 않을 수 있나."

지난해 어머니는 "애 딸린 홀아비가 부모까지 모시고 산다면 누가 시집오겠어"라며 나를 내보내셨다. 채원이와 단둘이 살면서 요즘은 더욱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됐다. 자기 전 꼭 한 시간씩 컴퓨터 게임을 같이 하고, 주말이면 디카를 들고 나들이를 간다. 채원이는 요즘 꿈이 발레리나가 아닌 경찰관으로 바뀌었다. "왜? 여자 경찰관이 멋있어서?" "아니, 아빠 괴롭히는 사람 다 혼내주려고."

딸의 일기

아빠는 툭하면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온다. 얼굴이 빨개져 입에서 냄새 풀풀 풍기곤 내 방에 들어와 "채원아, 아빠가 술 못하는 거 알지. 어쩔 수 없이 딱 한 잔 했다"라며 얼굴을 비빈다. 정말 싫다. 게다가 담배쟁이다. 눈치를 줘야 베란다에 나가 피운다.

그래도 친구들한테 아빠는 인기 짱이다. 찢어진 청바지, 염색한 머리가 신기한 모양이다. "야, 네 아빠 우리 아빠랑 정말 달라. 배도 안 나왔어."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아빤 앞치마를 두르곤 피자를 직접 만들어 준다. 나한텐 만날 '짜파게티'만 끓여주면서.

그래도 화가 나면 너무 무섭다. 숙제 안 하고 늦게까지 TV 보고 있으면 큰소리가 난다. "화장실 가 있어. 네가 생각해서 뭘 잘못 했는지 알았으면 나와." 그럴 땐 화장실에서 무조건 15분 이상은 있어야 한다. 눈치없이 바로 나갔다가는 더 혼난다. 고개를 푹 숙이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지난 운동회 땐 다른 애들은 엄마랑 왔지만 난 아빠와 같이 갔다. 당연히 함께 달리기에선 우리가 1등을 먹었다. 다른 애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한 명이 "엄만 어디 갔어"하고 묻기에 꿀밤을 먹여줬다.

요즘 아침 등교할 땐 아빠가 머리를 따준다. 느려 터져 내 속도 터진다. "아빤, 왜 이렇게 못해. 잘 묶을 줄도 모르고. 할머니가 훨씬 잘해." 그래도 난 아빠가 머리 따주는 게 좋다.

노래방에 가면 우리 듀엣곡이 있다. 칠공주의 '러브송'이다. "흰 눈이 기쁨 되는 날-." 우린 목이 터져라 부른다. "채원이, 우리 다음에 음반 내자." "아빤 노래 못해 안돼. 새엄마 생기면 그땐 한번 생각해 볼게."

글=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권홍진씨는 "혹시 채원이가 커서 원망할지도 모른다"며 아이 얼굴이 나오는 것과 실명이 공개되지 않기를 부탁했습니다. 취재에 협조해 주신 권씨 부녀께 감사드립니다.

'싱글 대디' 5계명

(1) 왜 엄마가 없는지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라.

이혼이든 사별이든, 상황을 알아야 아이가 적응한다.

(2) 엄마에 대한 비방이나 미화, 둘 다 피하라.

지나친 증오나 그리움은 아이 정서 발달에 좋지 않다.

(3) 아이와 긴밀한 대화를 자주 나누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4) 애정표현을 의도적으로 자주 하라.

엄마가 줄 수 있는 사랑을 대신이라도 주어야 한다.

(5) 정보를 구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라.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 부모 역할에 대해 배워라.

조언=황은숙 한부모가정연구소장 (02-2203-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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