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설립 50주년 신진욱 협성학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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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재단은 반세기동안 대구를 지키는 양심적인 서민을 길러냈다고 자부합니다."

지난 27일로 학교법인 협성교육재단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설립자 신진욱 학원장(82.사진)은 지난 25일 "돌아보니 처음 목표했던 것의 3분의 1 정도가 달성된 것같다"며 "그래도 곳곳에 우리 가족이 버티고 있어 행복하다"고 운을 뗐다. 신 학원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건장했다.

협성교육재단은 1955년 협성상고로 출발해 현재 12개 중.고교에 1만2000여명의 재학생과 700여명의 교직원이 있는 중등으론 국내 최대 사학이다. 지금까지 배출한 졸업생만 27만명에 이를 정도다.

그가 이루지 못한 3분의 2는 지역 엘리트 양성과 대학 설립 같은 것이다. 그는 "그 목표는 신철원 이사장이 이룰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신 학원장은 "한국전쟁때 고아를 맡아 키우다가 학교가 이들을 받아주지 않아 학교를 세우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스스로 벌어 먹을 수 있는 실업 교육을 생각해 협성상고를 세웠다. 이후엔 인문계 명문학교를 세우고 싶었지만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는 것.

"명문고처럼 판.검사는 배출하지 못했지만…그래도 협성상고 초창기 졸업생 가운데는 장군도 몇명 배출되고 경북예고에선 국내 정상급 소프라노도 나왔습니다. 나이 먹은 만큼 학교도 큰 겁니다." 그래서 그는 국내 두번째로 설립한 경북예고를 발판으로 지역에 미니 예술대학을 설립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신 학원장은 8,14대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대구의 원로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학원 경영에 장애가 돼 온 야당 일변도의 정치 행보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자유당 시절 민주당에 학교 운동장을 선거 유세장으로 빌려 주었어요. 그때만 해도 어느 기관이든 야당에 선뜻 집회장소를 빌려 주지 않았습니다. 부당했지요. 대구사범을 나와 교사 시절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저는 미련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끝까지 밀어부치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야당과 가까워지고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야당 생활을 하느라 관(官)으로부터 많은 멸시도 받았다"며 "이상한 것은 나를 미워하던 이들도 세월과 함께 다 사라지더라"고 빙그레 웃었다. 신 학원장은 재단 50주년을 맞아 다음달 3일 협성 가족을 대구시민회관 뮤지컬 잔치에 초대한다. 어려운 시기를 헤치고 재단을 지켜 준 협성재단 소속 교사.직원 등 가족에 보내는 보답 행사다. 그는 요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재단 소속 학교를 들러 '힘을 합해 이룬다(協成)'는 창학 정신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만년 교육자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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