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일값 싸다고 좋아할수만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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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날이 그날 같은 무덤덤한 도회의 생활 속에서 나무마다 활활 불은 가을을 보내고 몇번째의 추위를 맞으며 개절을 실감한다. 가슴을 헤집고 지나는 만감과 더불어 한번쯤은 회오에 잠겨 쓸쓸해지기도 하지만 단풍의 절정에선 나뭇잎의 색깔은 오히려 아름다웠고 추위와 함께 흩뿌렸던 것 눈은 감동을 준다. 반복된 경험만 없다면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을 수 있을 아름다움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 특별히 머물러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가고 있는, 자연의 흐름을 느낀다.
거리엔 벌써 열심히 비질하는 청소원아저씨들이 허연 임김을 내며 흩어진 가로수의 낙엽들을 쓸어 모으고. 이미 몇차례 찾아온 추위 때문애 주부들은 겨울채비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식구들에게 따뜻한 옷가지도 장만해쥐야겠고. 땔 것도 넉넉히 들여놓고싶고, 때 맞춰서해 넣어야되는 김장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낙엽의 있음은 벌써 잊고만다.
시장엘 가보면 지방에서 반입되어 온 싱싱한 체소들이 더미로 쌓여있어서 보기만해도 좋다. 올해는 세계적인 퐁년이라던가. 우리나라도 몇년간의 가뭄과 냉해의 피해로 흉년이 들었다가 올해는 논·밭농사와 과일이 두루 풍년이라고 한다. 풍년은 농사지은 사람에겐 땀에 대한 보답이 커서 좋고 도시 사람들에겐 생활비를 가볍게 해주고 마음을 풍요롭게 해줘서 다같이 좋아한다.
특히 우리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던 10억원의 외국쌀 값을 생각하면 올해의 풍년이 얼마나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시장에 갈 때마다 나는 솜씨좋은 상인들이 쌓아놓은 색깔 고운 과일목판 앞에서, 잘생긴무우와 배추더미에서 풍요로움을 만나며 한껏 즐거워진다.
그것은 농사를 짓고있는 우리 시골 친척들의 새까만 얼굴과 만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여러사람들- 타작을 끝내고 얼굴에 한껏 주름을 잡으며 활짝 웃는 얼굴이 있다.
지난 여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진흙속에서 울면서도 땀흘리며 벼포기를 헹궈 세우던 얼굴이 있다.
그 옆에서 시뻘건 강이 되어 흘러가는 농토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그나마 진흙 속에서라도세울 수 있는 벼가 있어서 다행한 이웃들을 부러워하던 절망의 얼굴도 보인다. 그들은 어떻게 그 상심을 회복했는지. 그때 신문을 읽으며 고작 한숨이나 쉴뿐이었던 내가 수확의 풍요를 기뻐하는게 부끄럽다.
태풍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평년작을 넘게 거두어낸 올 같은 해엔 어느 때보다도 농민들이만족할만한 보답을 받았으면 좋겠다.
풍년의 기쁨 뒤에 농민들의 얼굴이 실망으로 어두워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풍년기근을 염려하는 것은 한낱 기우겠지만 신문에서 보면 오르기만하는 물가 가운데서 유독 농산품의 값만이 내리거나 보호받지 못하는 인상을 받는다.
도시에 살고있는 나는 농산물이 쌀수록 경제적인 덕을 보지만 농사짓는 친척들의 눈물을 생각하면 무조건 값싼 농산품만을 반가와할 수는 없다. 풍년이 들면 공급이 많아서 헐값이되고 흉년이 들어도 수입농산품때문에 별재미가 없어서 농사에 의욕이 줄고 이농의 유혹에도 약해진다는 농민의 불평을 들은 일이 있다.
중간상인들의 값싼 밭떼기에서부터 시작하는 몇단계의 복잡한 유통과정은 농사짓는 사람들이나 소비자들에게 다 같이 커다란 손해를 주고 있다. 농민들 손에 돌아오는 액수의 몇배가 넘는 돈이 새어나가야하는 중간의 유통과정은 정책으로도 줄일수가 없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아무리 값싼 채소와 과일도 한꺼번에 사들여 쌓아두고 먹을 수는 없다.
몇 년전인가, 밭고랑마다 그대로 얼어서 나뒹굴어 있던 그 많은 배추가 생각난다. 갈무리할 시설이 있어서 버리지 않고 싼값에 사먹을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알의 곡식이 거두어지기까지 백번이상의 손길이 거쳐가야 된다고 한다.
정성의 손길로 거두어진 이들 수확물을 더욱 소중히 아는 마음가짐을 가져야겠다.

<약력>▲43년생▲67년 이대국문과 졸업▲81년 제1회 중앙시조 백일장 일반부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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