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길잃은 양』…민중등진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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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늘날의 기독교가 예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기성 교회로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자타가 인정하듯 오늘의 교회와 예수와의 거리는 주식회사와 예수의 거리만큼이나 먼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언필칭 예수의 교회를 자처하지만 갈릴리에서 머리둘 곳도 없이 방랑하면서 소외된자, 가난한자, 병든자, 약한자, 의에 굶주렸기에매맞고 박해받은 자를 찾아 위로하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궁극적 승리의 소망을 안겨준 예수와는 너무도, 너무도 거리가 먼 기독교다.
엄밀한 의미에서 서양의 기독교는 물론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예수와·상관없는 자기 고백적인 교회가 아닌가하는 점이다.
착각은 자유라고 하는 젊은 친구들의 말대로 오늘의 교회는 스스로 예수의 적자라도 된듯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독교사 그자체가 말해주듯이 예수는 어떤 특정 사회적계층에의해서 저들의 입장과 권익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로서 이용 내지는 도용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 우리는 참말로 종교공해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말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까지를 포함하여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운 사실이다.
이 말은 종파나 교파의 난립, 분열장과 혼돈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저 만큼 떨어져 나갔다는데서 오는 종교 안팎의 반성이다.
성경의 누가복읍만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영토와 주권이 로마제국에 넘어간지 어언 70년이 된 때에 여리고라고 하는 도경계선에 세관이 있었고 세관장에「삭개오」라고 말하는 친 로마인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구차하게 살아가는 약소민족의 한 사람으로 마치 일제하에 일본에 붙어 살아온 우리의 일부 아버지들처럼 스스로 부끄럽게, 민중이 개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외세 로마를 업고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통행세등을 받아 먹으며 치부까지하고 잘사는 사람「삭개오」를 예수는 만났다.
못속이는 것은 양심이라고, 괴로왔던 「삭개오」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만나려 했고, 과연 예수를 만난후 자기 삶과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는 회개했고, 그로말미암아 「삭개오」는 구윈받았다.
그는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토록 탐욕스랍게 모았던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토색질한 비위의 몫에 대해서는 4배로 배상하겠다는 회개를 한다. 이러한 결단을 통해 「삭개오」는 다시 이스라엘의 민중의 품으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예로, 민족사의 한복판에 하나님의 담당한 아들로 제자리를 찾게된다. 여기서 예수는 『나는 이와같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는 본래적 사명을 선포한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 기나긴 한국 민족사에, 중국·소련·일본, 오늘의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도 오늘의 「삭개오」는 수없이 많다. 매판적 삶인「삭개오」식의 생존양식은 약소국가인 어느 나라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잃어버린 사람들!
오늘. 이 세대는, 특별히 예수와의 관계계 정통화하려는 교회는 이와같은 오늘의「삭개오」를 민족사와 민중의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 들여야할 책임이 있다.
많은 군중들이「삭개오」를 비판만하고 미워했지만 예수는 이를 넘어서「삭개오」를 끌어 들였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신 것이다.
오늘의 삭개오! 잃은 양은 작은자, 노동자·농민이 아니다. 소시민·영세민이 아니다. 오히려「삭개오」처럼 세금을 책정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밖의 힘을가지고 안에서 큰 소리치며 사는 정치인·학자·경제인·종교인등일 것이다. 민중을 얕보며 천하다, 무식하다, 버릇없다하며, 우리의 것은 후진것이고, 외제가 좋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의식이 오늘의「삭개오」다.
오늘의 교회적 사명은,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 자유롭고,평등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아들·딸 낳고 재미있게 살기위하여 수많은 「삭개오」들을 회개시켜야 하는데 있다.
1940년 황해도태생
연세대신학대 졸업
연합신학대대학원졸업
기독교 대한복읍교회 총무
현 서울녹반동 봄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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