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그래도 '인계철선' 유지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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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주한미군의 '인계철선(引繼鐵線.trip-wire)' 역할에 대한 미국 측 거부반응이 갈수록 예사롭지 않다. "불공정한 말이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운을 떼더니만 마침내 "미 2사단 장병들에게는 모욕이다" "이미 파산한 개념"이란 막말까지 나왔다.

인계철선은 북한의 도발이 있을 경우 미국의 군사개입을 보장하는 전략적 상징이다.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미군은 한국 안전을 위한 볼모가 된다. 미군들에게 유쾌하지는 않지만 양국 관계가 원만했던 시절 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계철선은 냉전 초기 베를린 주둔 미군에서 유래됐다. 당시 베를린은 4개국에 분할 점령됐고 동독 영토 속의 '외딴 섬'이었다. 그래서 소수의 미군을 인계철선으로 주둔시켜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을 시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결성되면서 인계철선은 미군의 유럽 주둔을 정당화하는 전략 개념으로 쓰여졌고, 이후 자동개입(automaticism) 내지 억지력과 같은 의미로 통용돼 왔다. 1차 걸프 전쟁 후 쿠웨이트에 남은 주둔 미군을 이라크의 재도발을 막는 인계철선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미 동맹에서 인계철선의 의미는 각별하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이 침략당할 경우 나토와 같은 즉각 개입의 보장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즉각, 자동 개입'의 명문화를 고집했지만 미국은 듣지 않았다.

따라서 휴전선 부근 미군 존재는 '공동 위험'에 대처하는 미국 측 결의의 구체적 증거였고 이들은 '총알받이'가 아닌 '자유의 프런티어'로 통해왔다.

미2사단의 한강 이남 배치가 급물살을 타면서 미국이 내세우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첨단 해군력 및 공군력 위주로 전략 개념이 바뀌고 있고, 미군 주둔 지역이 도시화하면서 주민과의 불필요한 마찰이 늘고 있고, 우리 모두가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있어 한강 이남과 이북에 사실상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한국적 안보 상황에서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우선 한반도는 지금도 기술적으로 전쟁 상태이고 휴전선을 마주보며 수십만 병력이 대치 중이다. 한국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며 미국의 자동개입 보장도 없다. 북한이 핵 보유를 스스로 시인한 마당에 미국 억지력의 상징은 절대 불가결하다. 이는 한국 안보뿐 아니라 전체 동북아 안정에도 긴요하다.

더구나 화력이 막강한 미2사단의 공백을 우리 군이 단기간에 메우기는 불가능하다. 공군력 및 해군력 위주로 전략을 새로 짤 경우 여차하면 한강 이남이 아닌 오키나와로 중심이 옮아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한국 투자 때 미군 주둔 이남 지역을 선호하는 외국인 투자가들의 패닉 현상 또한 우려된다. 북핵의 평화적 해결에 실패할 경우 북한을 치기 위해 미군을 한강 이남으로 빼려 한다는 추측들이 고개를 드는 판이다.

싫든 좋든 인계철선은 한.미 동맹의 골간이며 대북 화해정책도 이 담보 때문에 가능했다. 북핵 해결과 휴전선 주둔 병력의 상호 감축이 실현될 때까지는 억지력의 상징으로 인계철선은 유지돼야 한다. 인계철선을 기계적으로 해석해 자기 비하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미국인들의 심사는 뒤틀려 있다.

인계철선은 원래 밟으면 폭발하도록 늘어뜨려 놓은 철사줄이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동맹 관련 발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 같은 불안을 대내외에 안겨왔다.

북한의 핵 보유 시인을 애써 협상용 내지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일부 우리 당국자의 '느긋한' 자세가 왠지 미덥지 못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변상근 논설고문